ADVERTISEMENT
오피니언 진중권 칼럼

'화가 구혜선' 왜 욕 먹나···'홍대 이작가'가 들춘 불편한 진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얼마 전 ‘홍대 이작가’로 활동하는 이규원 작가가 팟캐스트 방송에서 구혜선씨의 작품에 악평을 한 적이 있다. 그는 구혜선씨의 작품이 “입시 학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라며 그에게 “본업에 집중하는 게 낫겠다”고 권했다. 이 발언으로 그는 거센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창작하는 연예인들에 대한 미술계의 반감은 뿌리 깊다. ‘조영남 대필’ 사건 때는 화가 단체들이 그를 엄중히 처벌하라고 성명을 냈다. 학자와 비평가들은 검찰에 기소의 논리를 제공하고, 어느 화가는 아예 법정에서 검찰측 증인으로 나섰다. 이 적대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기능이 아니라 신분으로서 예술가 #누구나 예술가되는게 현대미술 꿈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된 창의성 #표적잃은 분노가 연예인 향한 것

하나의 근원은 화가를 ‘기능’이 아니라 ‘신분’으로 보는 낡은 관념. 한 마디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이 작가 행세하는 게 보기 싫은 것이다. 돈으로 족보를 사서 양반행세 하는 상놈을 바라보는 몰락 양반들의 심정이랄까. 조영남 사건 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규원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통 예술가들은 짧게는 대학 4년 길게는 유학 포함 7~8년 동안 내내 교수님, 동료들, 평론가들에게 혹독한 평가를 받고 미술작가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이것이 한 사람을 온전한 ‘미술작가’로 대접해 주기 위한 그들의 자격요건이다.

하지만 작가가 되기 위해 꼭 ‘제도권’을 거쳐야 하나? 현대미술의 출발점인 인상주의 운동은 제도권 밖에서 일어났고,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은 아예 제도권 비판으로 먹고살았다. 20세기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제도권의 성채를 무너뜨리고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사회를 꿈꾸지 않았던가.

작가는 사회의 미학적 문화를 책임진 존재. 작품을 만드는 것은 그 임무 중 일부일 뿐이다. 예술은 자기 목적이 아니다. 작가의 존재 이유는 대중이 세계를 미학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그 체험은 단순한 감상에서 출발해 스스로 작품을 만드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연예인들이 직접 창작을 하고 전시를 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라 외려 권장할 일이다. 영화를 공부하지 않은 이들이 영상물 만들고,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이들이 작곡을 하고, 언론학을 배우지 않은 이들도 방송을 하는 시대에, 왜 미술계에선 진입장벽의 드높음을 강조할까?

구혜선이 소인(素:아마추어) 창작에 머물렀다면 그들에게 칭찬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전업 작가들이 참지 못하는 것은 그가 작품을 판매까지 한다는 사실일 게다. 생각해 보라. 자기들 작품은 안 팔리는데, 자기들이 보기엔 아마추어에 불과한 이들의 작품이 팔리다니,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그들의 생각대로 그가 연예인의 유명세를 이용해 ‘입시학원’ 수준의 작품을 팔아먹고 있다 치자. 그렇다 한들 그걸 불편하게 여길 이유는 없다. 팬심으로 그림을 사 주는 이들이 구혜선의 작품을 안 산다고 그 돈으로 예술성 높은(?) 전업 작가들의 작품을 사겠는가. 둘은 시장이 다르다.

이 적대감의 바탕에는 어떤 좌절감이 깔려 있는 듯하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극화가 제일 심한 곳이 미술계. 그곳에서는 미술계에 할당되는 사회적 부의 대부분을 소수의 스타작가들이 차지한다. 대다수의 작가들은 말이 ‘전업’이지 작품활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기조차 힘들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평균적 노동량으로 결정된다. 한 상품을 만드는 데에 A는 1시간, B는 2시간, C는 3시간이 들었다 하자. 이때 상품은 6/3=2의 가치를 갖는다. 1시간을 들인 A는 평균보다 1을 더 받고, 3시간을 들인 C는 1을 덜 받는 셈이다. 생산력이 높은 A가 생산력이 낮은 C의 노동량을 제 것으로 취하듯이 한 점에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을 받는 스타작가의 작품은 그 가치를 평균 이하로 평가받거나, 아예 가치 실현에 실패한 수많은 작가들이 흘린 땀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미술시장만큼 신자유주의적인 곳도 없다.

‘노동가치설’에 입각한 이 비판을 반박하는 자본주의적 어법은 ‘현대사회에서 가치는 노동력이 아니라 창의성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술계만큼 이 신자유주의 논변이 완벽히 들어맞는 곳이 다시 있을까? 노골적인 실력주의가 비판은커녕 외려 상찬되는 곳이 미술계가 아닌가.

예술은 시대를 앞서 왔다. 마르셀 뒤샹은 백 년 전에 개념과 물리적 실행을 분리했다. 요즘 기업들은 제품의 제작을 임금이 싼 나라에 맡긴다. 이른바 ‘양극화’는 미술계의 논리와 어법이 사회에 관철된 결과로 발생한 일종의 미학적 자본주의 현상이다. 예술이 꼭 유토피아인 것은 아니다.

이 창의성 신화의 근원이 실은 미술계. 그러니 작가들이 이 현상을 비판하기도 뭐하다. 그래서 표적을 잃은 분노가 연예인을 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가치실현을 거절당하는 무명작가들의 보편적인 운명에서 연예인들만 ‘예외’가 되는 게 ‘공정’하지 못하게 보였을 게다.

그들의 좌절은 요즘 젊은이들이 느끼는 그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러니 그들의 분노 또한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