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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추억] 20세기를 빛낸 '성악계의 백작부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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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957년 9월 6일 런던 킹스웨이 홀에서 오페라 '카프리치오'의 레코딩을 마친 음악가들. 왼쪽부터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소프라노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그녀의 남편인 레코딩 프로듀서 월터 레게, 지휘자 볼프강 자발리슈.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소프라노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가 3일(현지시간) 오스트리아 서부 슈룬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90세.

마리아 칼라스(1923~77)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소프라노로 꼽히는 그녀의 별명은 '성악계의 백작 부인'. 세련된 무대 매너와 우아한 기품의 소유자였던 만큼 자존심도 강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에서 아델레 역으로 출연하다가 조역인 이다 역으로 바뀌자 공연 도중 실수를 가장해 무대에 설치된 그림을 찢어버렸다. 극장 측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한동안 그녀에게 '마리아 헬퍼'라는 가명을 쓰도록 했다. 베를린 슈타츠오퍼 단원으로 있던 1941년의 일이다.

3년 후 지휘자 칼 뵘에게 발탁돼 빈 슈타츠오퍼로 무대를 옮겼다. 49년 일곱 살 연상인 카라얀의 초청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백작 부인 역(모차르트'피가로의 결혼')으로 데뷔, 63년까지 줄곧 출연했다. 30세 때 세계 굴지의 음반사인 EMI의 예술감독이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창설자인 월터 레게와 결혼했다. 레게는 31년부터 64년까지 3500장의 음반을 제작한 명 프로듀서. 이들 커플이 만들어낸 음반 가운데 65년 조지 셸 지휘의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과 녹음한 R 슈트라우스의 '4개의 마지막 노래'가 가장 유명하다.

슈바르츠코프는 60년대부터 백작 부인을 비롯해 마샬린(R 슈트라우스'장미의 기사'), 돈나 엘비라('돈조반니'), 피오르딜리지('코지 판 투테')등 몇 개의 배역에만 주력했다. 그녀는 리트(독일 가곡)에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71),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1899~1987)와 함께 녹음한 볼프의'이탈리아 가곡집' '스페인 가곡집'은 세계적인 명반으로 꼽힌다.

그녀의 마지막 오페라 무대는 71년 브뤼셀에서 출연한 '장미의 기사'. 79년 취리히에서 열린 고별 독창회에 남편 레게가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참석했다가 사흘 만에 숨지는 안타까운 일을 겪기도 했다.

그 후 후진 양성에 주력, 미국 출신의 세계적 바리톤 토머스 햄슨 등을 가르쳤다.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그녀는 제자들에게도 까다롭고 무서운 존재였다. 10년 후배인 피셔 디스카우는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까지 주면서 가르쳤다"고 말했다.

화려했던 그녀의 무대 뒤편에는 나치의 그림자가 평생 따라다녔다. 82년 뉴욕 타임스가 나치 치하 음악가들의 행적을 보도하면서 슈바르츠코프를 '나치의 여신'이라고 비꼬았다. 96년 영국의 유대계 음악평론가 애런 제퍼슨은 슈바르츠코프의 전기에서"베를린 국립 음대 재학 중 나치 학생연합의 간부를 맡았고 괴벨스 선전장관 휘하의 제국 영상원에 들어가 나치를 찬양하는 영화에도 출연했다"고 폭로했다. 이에 슈바르츠코프는 뉴욕 타임스에 보낸 해명 서한을 통해 "당시 나치 당원 가입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고 직업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73년 2월 이화여대 강당과 대구가톨릭대 강당에서 열린 내한 독창회에서 '피가로의 결혼' '장미의 기사' 중 아리아를 불러 한국 음악팬들을 사로잡기도 했다. 91년 1차 걸프전 때 미군사령관이었던 노먼 슈워츠코프(72)의 고모이기도 하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 바로잡습니다

8월 5일자 25면 '삶과 추억-20세기를 빛낸 성악계의 백작부인'기사에서 레코딩 프로듀서 월터 레게가 창설한 교향악단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1945년 창단)입니다.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1932년 지휘자 토머스 비첨 경이 창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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