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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신발에 '정액 테러'…"성범죄 아닌 재물손괴" 황당사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제 담요를 CCTV에 안 보이게 옷 속에 숨겨서 화장실로 가 음란행위를 하고 제가 항상 접어두는 방향으로 접어서 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이건 명백한 성범죄입니다.”

지난 1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독서실에서 정액 테러를 당했다”는 제목으로 올라온 글의 일부다. 평범한 취준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A씨는 “다 펼쳐야 보이는 접힌 면 안쪽이라 저는 가해자가 몇 번이나 같은 행위를 한 것도 모르고 정액 묻은 담요를 계속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A씨는 “가해자는 성범죄가 아닌 재물손괴죄와 방실침입죄로 기소가 됐고 구약식으로 벌금형을 받았다”며 “이유는 이 상황에 맞는 법이 없다는 것이었다”고도 했다.

[이슈추적]

체액 테러 대부분 ‘재물손괴죄’로 처벌

지난 1일 피해자 A씨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고소장. 네이트판 캡처

지난 1일 피해자 A씨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고소장. 네이트판 캡처

A씨는 “아직도 가해자와 비슷한 인상착의만 보여도 몸이 굳고 그때의 장면들이 생생하게 다 기억난다”고 했다. 그는 “제 잘못이 아닌 줄 알면서도 자신을 검열하게 되고 여지를 준 게 있는지 자책하게 된다”고 호소했다. 이어 A씨는 “가해자는 현재 이름도 바꿨다”며 “죄명이 훗날 타인에게 밝혀져도 술 먹고 실수로 물건을 망가뜨렸다는 등 거짓말로 넘어간다면 누가 정액 테러라는 음침하고 찌질한 범죄를 저질렀을 거라 생각하겠냐”덧붙였다.

A씨가 당한 피해는 ‘정액 테러’로 불리며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지난 2018년에는 부산교대에서 한 남성이 여학생이 잠시 올려 둔 가방과 학습지, 과자 등에 정액을 뿌리고 도망간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에도 경찰은 건조물 침입죄와 재물손괴죄를 적용했다. 지난 2019년 동국대에서 여학생 신발에 정액을 넣어둔 사건에도 피의자는 재물손괴죄로 검찰에 송치됐다.

사람이 대상이어야 ‘강제추행’

성범죄 일러스트. 중앙포토

성범죄 일러스트. 중앙포토

지난해 말 경남 김해에서 한 남성이 길 가던 20대 여성의 등 뒤에 ‘흰색의 점액질로 된 액체’를 뿌리고 도망갔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이를 연유와 계란으로 만든 ‘가짜 정액’이라고 판단했다. 이후 경찰은 이 남성에게 강제추행 혐의를 작용해 불구속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과거 진짜 정액이 사용된 사건에서 적용되지 않던 강제추행죄가 가짜 정액 사건에서 적용된 이유는 뭘까. 경찰 관계자는 “이 경우는 사람이 직접 대상이 돼 강제추행 혐의가 적용된 것”이라며 “사람이 없는데 물건에 그런 행위를 할 경우 물건의 효용을 해한 것이기 때문에 재물손괴죄가 적용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관련법 발의됐지만…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1월 형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정액 테러같이 심각한 성적 불쾌감을 일으키는 사건은 현행 형법의 개정을 통해 성추행의 개념 속에 포함해 중범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게 이 의원의 주장이다. 이 개정안은 형법 298조를 개정해 “성적인 목적으로 물체, 물질 등을 이용해 상대방의 동의 없이 추행한 사람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는 게 골자다.

전문가들은 더 실효성 있는 개정안이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경찰 관계자는 “상대방 사진에 정액을 묻혀 사진으로 찍어 보내는 등 이제는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증가하고 있어서 세밀한 범죄 행위를 규정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행위를 포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규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스토킹 처벌법에 알고 지내던 사람의 정액 테러 행위 등을 포함해 엄벌할 수 있게 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김경수 변호사(법률사무소 빛)는 “체액 테러의 경우 적용할 수 있는 법이 재물손괴죄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피해자가 정신적 피해 등으로 인한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는 가능하지만, 그 금액이 아주 적어 의미가 크게 없다”고 말했다. 이어 “발의된 개정안은 기존 재물손괴죄의 형량과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내려지는 처벌은 벌금형으로 지금과 비슷할 것 같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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