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납세자 동의 없는 종부세 부과, 사회 갈등 깊게 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누더기 종부세 개편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4·7 재·보궐선거 결과에 충격받은 민주당이 부동산특위를 구성하고 진통을 거듭한 끝에 개선안을 내놓았다. 세금을 완화하자는 쪽에서는 이대로는 대선 못 이긴다 하고, 안 된다는 쪽에서는 부자 감세라고 반발했다 한다. 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뒤에 따져보겠지만, 기가 막힌 것은 양쪽 다 세금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아무런 개념이 없다는 점이다. 완화하자는 쪽은 대선 승리라는 선거공학에만 관심이 있고, 안 된다는 쪽은 상위 2%에 해당하는 최소 100만 명의 국민을 적폐 취급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착각하고 있다.

한국 재산세율이 OECD 평균보다 2배 이상 높은 상황에서 #특정 집단에 부담 집중, 불특정 다수에 혜택 가는 종부세 #세금 많이 내고도 비난받아 사회적 갈등과 저항 초래 예상 #세율 인하와 세입 기반 확대라는 세계적 추세에도 역행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볼프강 쇤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세금은 국가 권력이 개인의 삶을 가장 거칠고 폭넓게 침범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적 합의에 따라 정당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이미 800년 전 마그나 카르타에 반영된 정신이고, 미국 수정헌법을 비롯하여 오늘날 전 세계 대부분 국가의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가 세금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은 의회가 예산을 의결할 수 있는 힘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세입과 세출 양쪽이 모두 국민과 그들의 대표자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세금정책에 투표하는 국민과 세금을 내는 국민, 세금의 혜택을 보는 국민은 같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고령화에 증세는 사회 갈등 요인

민주적 과정을 거치지 않은 세금을 강제하면 그것이 곧 독재이고 절대 왕정이다. 프랑스혁명이나 미국 독립전쟁은 모두 합의되지 않은 세금에 대한 저항이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서 결정했으니 민주적 과정을 거친 것이라는 권위주의적 발상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교사가 틀린 지식을 가르쳤더라도 학교에서 가르쳤으니 맞는 지식이라고 말할 셈인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한국 정치의 흠결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지금부터 경험할 한국 정치의 흠결은 세금고지서에 숫자로 찍혀 나올 것이다.

한국에서는 특히 세금이 민주적 합의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각별한 이유가 있다. 바로 세계 최고 수준의 고령화 속도 때문이다. 고령화는 GDP, 노동시간, 소비, 투자, 그리고 세수를 모두 감소시킨다. 그럼 고령화는 우리의 재정에 실제로 얼마나 부담이 될까. 경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일본은 고령화 단계에 도달한 이후에도 세수를 유지할 여력이 있지만, 불행히도 한국은 그런 여력을 가지지 못한다. 고령화의 충격으로 해마다 재정 적자를 본 지 30년이 넘는 일본보다도 더 큰 타격을 받는다는 뜻이다. 대규모 증세가 불가피하다. 가장 세금을 많이 낼 사람들은 지금의 2030 세대다. 증세에 대한 민주적 합의를 조심스럽게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앞으로 세금은 최고의 사회적 갈등 요인이 될 것이다.

재산세는 자칫하면 인질극이 된다. 소득세는 소득이 줄면 줄어들고 소비세는 소비를 줄이면 적게 내지만, 말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자산인 부동산에 대한 과세는 납세자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세금이기 때문이다. 견디지 못할 것 같으면 탈출해야 하는데, 움직이지 못하는 자산인 부동산은 탈출이 어렵다. 양도세까지 높여 놓으면 아예 불가능에 가깝다. 도망도 못 가고 계속해서 두들겨 맞으라는 뜻으로 해석되니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10명 중 4명 소득세 한 푼 안 내

게다가 재산세는 자산의 순가치가 아닌 총가치를 기준으로 부과된다. 빚을 안고 샀든 현금 주고 샀든 똑같은 세금을 낸다. 부채 없이 집을 산 현금 부자는 상대적으로 고통을 덜 느끼지만 ‘영끌’해서 집을 산 서민은 훨씬 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사라진다. 재산세가 누진세라는 보장도 없다. OECD는 재산세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누진적일 수도 있고 역진적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새로 시행되는 재산세도 누진적 성격과 역진적 성격이 마구 뒤섞여 있다. 서민과 청년세대의 비명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거친 입법의 결과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역진적 성격 때문이다.

한국의 조세부담률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지만, 아직 OECD 평균에 못 미친다. 내용을 뜯어보면 다음과 같다. GDP 대비 소득세 비율은 5.4%로 OECD 평균인 8.3%에 한참 못 미친다. 부가가치세(4.6%)도 평균(7.0%)보다 낮다. 반면 법인세(3.8%)는 평균(3.0%)보다 높고, 특히 재산세(3.3%)는 평균(1.9%)보다 무려 1.7배나 높다. 그나마 2019년 통계이니 최근에 이루어진 재산세 인상분을 고려하면 2배가 훌쩍 넘을 것이다.

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는 과세 미달자는 무려 36.8%로 10명 중 4명이다. 면세점이 그리 낮은 것도 아니어서 이들 중에는 소득세를 낼 여력이 있는데도 면제받는 사람들이 꽤 섞여 있다. 조세의 형평성 문제도 있지만, 사회적 연대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복지국가가 작동하려면 함께 부담하고 함께 혜택을 보는 사회적 연대의 형성이 핵심이다. 소득세를 한 푼도 안 내는 사람은 무임승차자로 인식되기 쉽다. 내가 낸 세금에 무임승차하는 사람에게 연대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경제적 형편에 따라 다만 100원이라도 소득세를 내야 한다는 국민개세주의(國民皆稅主義)는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재산세 대폭 감면해 성공한 스웨덴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유승민 전 의원의 용기 있는 연설은 아직도 유효하다. 세제 개편의 세계적 추이는 경쟁적 세율 인하와 세입 기반 확대다. 글로벌리제이션 이후 주권국가의 독자적 영역은 크게 축소되었다. 자본과 고급 노동력의 이동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면서 다른 나라의 정책에 동조화하지 않으면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추세에 모두 거꾸로 가고 있다. 표 떨어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재산세 인하는 정말 부자에게만 좋은 것일까. 2006년 스웨덴 총선에서 중도우파 연합이 승리하면서 공약 사항이었던 재산세 감세가 즉시 시행되기 시작했다. 이 감세는 ‘재산세의 소멸’이라고 부를 정도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감세 이전 연간 재산세는 평가액의 1%였는데, 감세 이후에는 0.75%가 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재산세 최고액에 캡을 씌웠다는 점이다. 집값에 상관없이 재산세는 연간 6000크로나를 넘지 못하게 되었는데, 원화로 환산하면 80만원쯤 된다. 당연히 부자일수록 훨씬 더 많은 감세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에 이 정책은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대규모 감세에도 불구하고 최상층 주택 이외에는 집값 상승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최상층 주거지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주택 공급의 탄력성이 비교적 높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중산층 이하도 집 사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어놓고 부자들 집값 내려가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거래세를 완화하고 주택 공급에 주력하는 것이 훨씬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는 뜻이다. 강남 3구에 신도시 개발할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루이 14세의 재정총감이던 장 바티스트 콜베르는 “세금을 걷는다는 것은 거위가 최대한 덜 꽥꽥거리게 하면서 최대한 많은 털을 뽑는 것”이라고 했다. 같은 세금을 걷더라도 납세자들이 견디다 못해 저항하는 조세 저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어떤 세금에 저항하고 어떤 세금을 순순히 받아들이는지는 이미 연구가 쌓여있다.

민주주의 없는 세금정책

1980~2010년 20개 민주주의 부국(富國)에서 일어났던 조세 저항을 연구한 아이삭 마틴과 나다브 개베이는 이것을 알기 쉽게 요약해준다. 납세 부담이 특정 집단에 집중되고 세금 혜택이 불특정 다수에게 갈 때 가장 많은 갈등과 저항이 일어난다. 한국의 재산세가 딱 이 꼴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금도 많이 내고 억울한 비난까지 받는데, 자기가 낸 세금의 혜택은 본인에게는 당연히 안 돌아오고 딱히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저항할 수밖에 없다.

반면 납세의 부담은 넓게 분산되고 세금의 혜택은 특정 집단에 집중되는 세금을 사람들은 가장 순순히 받아들인다. 사회보장기여금이 대표적이다. 4대 보험 내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별로 없다. 누구나 낸다고 생각하고, 나는 소득이 높으니 더 낸다는 것도 받아들인다. 하지만 실제로 사회보장기여금의 혜택은 가장 적게 낸 서민층에 집중된다.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재분배 효과를 높이는 방식이다.

원칙도 없고 효과도 없고 글로벌 트렌드에 역행하고 사회 갈등을 조장하는 세금정책은 왜 자꾸 만들어지는 것일까. 세율이 문제일까? 부자 감세가 문제일까? 투기가 문제일까?

이제는 눈치챘기를 바란다. “멍청아, 문제는 민주주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