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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길의 ‘인간 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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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정치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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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과 우리 국민들의 유대는 신뢰와 경애에 의한 것이지, 신화나 전설에 의한 것이 아니다. 천황이 ‘살아있는 인간 신’이며, 일본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해 세계를 지배할 운명이라는 것도 ‘가공의 관념’이다.”

무오류성과 ‘내로남불’의 민주당 #송영길 대표 취임 이후 변화 조짐 #사과하고 고쳐야 정권재창출 희망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한 이듬해인 1946년 1월 1일 일왕 히로히토(裕仁·일본에선 쇼와 천황)가 발표한 조칙의 일부다. ‘인간선언’으로 유명한 이 조칙은 한마디로 ‘천황은 신이 아닌 인간이다’란 내용이다. 일왕이 신격을 포기하면서 군국주의의 기반이던 신정국가체제는 해체됐다. 신성성과 무오류성을 잃은 일왕은 통치권까지 잃었고, 이후 공포된 헌법에서 ‘상징적 존재’로 위상이 격하됐다. 인간선언은 연합군측과의 타협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일왕의 전쟁 책임은 탕감됐고, 천황제 자체는 존속됐다.

히로히토 일왕의 인간선언이 문득 떠오른 건 ‘무오류성의 포기’란 측면에서 송영길 대표 체제 더불어민주당과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무오류성’은 문재인 정권과 지지자들의 인식 저류에 흐르는 집단적 심리 코드로 주목받았다. 조국사태를 거치며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자기확신적이고 광기 가득한 ‘내로남불’이 도마에 올랐는데, 그 원인을 무오류성에 대한 신념에서 찾는 이도 있었다.

김경률 경제민주주의21 대표는 지난해 3월 본지 인터뷰에서 조국 사태와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과 관련한 여권의 태도에 대해 “(학생운동권 조직)NL의 잔상이 느껴졌다. NL의 정치 이념적 기반은 주체사상이고, 주체사상의 하나가 수령의 무오류성이다” "현 집권 세력은 사과를 한 번도 안 했다. 자기들은 잘못한 게 없다고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선 그러지 않았다. 적절한 시점에 잘못한 걸 인정하고 검찰 수사에 맡겼다”고 했다. 김경률이 말한 ‘수령의 무오류성’에 기인했든, 아니면 맹신적인 우월감에 기반했든 “우린 선의를 갖고 있으니 언제나 옳다, 적어도 야당보다는 옳다”는 항변에 기막혀하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서소문 포럼 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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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송영길 대표 체제가 들어선 이후 이런 무오류성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다. 그동안 민주당 내에서 최소한의 정치적 염치나 부끄러움을 드러낸 이들은 20대 국회의 ‘조금박해’(조응천·금태섭·박용진·김해영), 조국 사태 공방에 대해 “부끄럽고 창피하다”며 불출마를 선언한 이철희 청와대 정무수석 등 극히 일부였다. 그런데 “당명만 빼고 다 바꾸겠다”던 송영길이 대표가 되자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그는 ‘무능한 개혁과 내로남불’을 폐습으로 지목했다. 여권 대선 주자들이 쩔쩔매는 김어준을 향해서도 “진보든 보수든 사실관계를 허위로 쓰는 것은 엄격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파트 환상을 버리라”던 부동산특위 진선미 위원장을 ‘세제 완화론자’인 김진표 의원으로 교체했다. ‘도자기 밀수 의혹’을 받았던 박준영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위해 바람을 잡았다. 청와대에 가선 “정책에 있어서 당의 의견이 많이 반영돼야 한다”고 했고, 탈원전에 대해서도 다른 얘기를 했다. ‘반쪽 사과’ 논란이 일었지만, 어쨌든 조국 사태에 사과했다. “당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강경파의 반대에도 양도세와 종부세 경감을 관철했다. “천안함 함장이 부하들을 수장시켰다”는 전직 당직자의 발언을 사과했고, “마음이 찢어진다”면서도 국가권익위가 부동산 투기를 의심한 의원 12명에게 탈당을 권유했다. 또 “흥행을 위해 경선을 미루자”는 막무가내식 주장도 진압했다. 청와대와 극성 문파의 눈치를 보며 로봇처럼 움직였던 지금까지의 리더십과는 차별화된 행보였다.

‘송영길의 인간선언’이라고 칭할만한 이같은 변화 시도는 8개월여 남은 대선을 의식한 몸부림이다. 그동안의 무오류성과 선민의식으로는 떠나간 중도층의 마음을 살 수 없고, 정권재창출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른 전략적 궤도 수정이다.

하지만 송영길식 인간선언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친문과 비문 후보간 대결이 사활적으로 격화되면 또다시 극성 문파의 순혈주의가 판을 치고 ‘조국의 시간’은 더 길어질 것이다. 추미애 전 법무장관의 출마 선언 이후 벌써 촛불혁명의 절대성과 무오류성이 강조되고, ‘추미애·윤석열 갈등’을 정당화하려는 음산한 기운이 움트고 있다.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이들과 인간선언에 저항하는 ‘신’들의 반격, 가물가물해 보이는 범여권 정권재창출의 희망은 어느 쪽이 더 힘을 쓰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

서승욱 정치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