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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의 순간’이 올 수도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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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2팀장

김승현 사회2팀장

유권자로 30년쯤 살아보니 ‘정치의 계절’을 타는 것 같다. 대선 정국이면 추석이나 설을 앞둔 것처럼 설레는 마음, 가을을 타는 듯 심란하고 불안한 감정이 함께 생긴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라며 무관심한 소시민들도 ‘잠룡’의 소식에 귀를 쫑긋하는 걸 느낀다.

대통령은 제왕도 마법사도 아니다 #‘공정’ 해법 못 찾는 현실 직시하고 #뉴노멀에 맞게 겸손·경계 붙들어야

5년에 한 번-때론 조금 더 일찍-찾아오는 대선 풍속은 ‘판타지’ 같기도 하다. 갑작스레 천지가 개벽해 새 시대가 열릴 것 같은 꿈과 희망이 넘쳐난다. 불과 5년짜리 단임 대통령이 환상 속 나라를 만들 것이라는 기대는 적잖이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우리 곁의 생활인이 갑자기 ‘백마 탄 초인’으로 변신하고 있다. ‘그’가 조만간 기적을 행할 것처럼.

속속 등장하는 대통령 후보는 미래를 장담하고 군중은 ‘별의 순간’을 찬미한다. 한쪽에선 범죄자나 역적인데 다른 쪽에선 영웅호걸이다. 우리의 정치 시스템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넘어 ‘마법적 대통령제’로 변질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자정을 넘겨 마법이 풀린 ‘재투성이 아가씨’처럼 엄혹한 현실 앞에 덩그러니 놓인 게 한두 번인가. 그렇게 좌절하고 불신감에 빠졌는데도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 시작점에 또 섰으니 이것은 악순환인가, 불굴의 의지인가. 새로운 모험의 여정은 다시 시작되고 있다.

잇따라 출사표를 던지는 여야 잠룡들의 모습이 20년 전의 영화 ‘반지의 제왕’(2001년 개봉)을 연상시키는 것도 그래서다. 존 로널드 로웰 톨킨(1892~1973)의 판타지 소설을 3부작으로 만든 영화는 막강한 어둠의 힘을 가진 ‘절대반지’를 영원히 없애려는 주인공들의 여정을 다뤘다. 절대반지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순수한 의지를 지닌 호빗족 ‘프로도’가 운반의 책임자다. 반지의 힘에 휘둘려 욕망의 괴물이 된 정반대의 캐릭터가 그 유명한 ‘골룸’이다. 반지를 향해 “마이 프레셔스!”라 외치던 추악한 인상이 지금도 강렬하다.

그러나, 판타지는 오히려 절대권력 앞에서 냉철했다. 절대반지가 모르도르의 화산에 던져져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는 서사에 흔들림이 없었다. 절대반지는 화산 속에 떨어지고 골룸은 죽는 순간까지 반지에 집착했다. 그 모습은 권력에 눈먼 정치인에 비유되곤 한다.

서소문 포럼 6/29

서소문 포럼 6/29

지난해 11월에도 그 비유가 등장한 적이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검찰을 향해 “절대반지를 낀 어둠의 군주”라고 지적하면서다. 조 전 장관은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을 반지원정대에 비유하며 검찰 개혁의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반년이 조금 더 지난 최근 검찰 인사를 보라. 영화 속 절대반지의 위력을 보는 듯하다. 문재인 정부에 불리한 수사를 하던 부장검사가 순식간에 일소됐다. 한 변호사 단체는 “문 정권의 법무부가 불의와 불법의 총본산임을 보여줬다”고 했다. 반지원정대가 절대반지를 손가락에 낀 것이다.

대통령을 꿈꾸는 잠룡들은 그 폐해를 보며 새로운 원정대를 자처할 것이다. 절대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절대반지를 폐기하겠노라 약속할 것이다. 그 뻔한 레퍼토리를 MZ세대는 참을 수 있을까.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건 2030뿐만이 아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당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이 20대보다 60대(68%)에서 가장 많았다는 여론조사(정한울 한국리서치 전문위원)는 예사롭지 않다.

숱하게 쟁점이 되는 ‘공정’과 ‘정의’ 등의 이슈에 정치가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데 대부분이 공감하고 있다. 분노한 청년들을 달래는 건 언감생심이다. 25세 여성을 청와대 1급 청년비서관에 파격 발탁하자 ‘박탈감닷컴’이라는 반대 사이트가 만들어졌다. 9급 공무원 시험에 인생을 건 공시족들은 “파격이 아니라 파괴”라고 분노했다. 정부를 향해선 “공정이라는 말 더이상 하지 마시라. 역겹다”고 외친다.

그 역겨움을 해소해 줄 후보가 있다면 이 시대의 초인이라 부를 만하겠지만, 그건 판타지다. 그가 있었다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방치되지도 않았다. 대통령 후보의 서사가 ‘제왕’이나 ‘마법사’처럼 비치면 국민은 곧장 ‘내로남불’을 염려할 것이다.

잠룡들에게 “이 시대의 뉴노멀은 미래를 잘 모른다는 것”(오세정 서울대 총장)이라는 진단을 음미해 보길 권한다. 잠룡들의 여정은 그 어느 때보다 아슬아슬할 수밖에 없다. 자신만만한 통찰은 언제든 빗나갈 수 있고, 절대반지만을 탐하는 이들은 감쪽같이 실체를 숨기고 있을 것이다. 겸손과 경계의 정신줄을 잠시라도 놨다가는 ‘골룸의 순간’이 금세 덮쳐올 것이다.

김승현 사회2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