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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살의 로맨스, 고두심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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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제주 해녀 진옥이 되어 멜로 연기에 나선 고두심을 21일 서울 평창동에서 만났다. [사진 명필름]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제주 해녀 진옥이 되어 멜로 연기에 나선 고두심을 21일 서울 평창동에서 만났다. [사진 명필름]

“손주뻘이고 뭐고 멜로? 못할 게 뭐 있니, 그랬죠. 고두심도, 영화 속 고진옥도, 일흔 먹은 척박한 삶에서 여자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빛나는 순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행동과 감성이 나왔다고 생각해요. 흔치 않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요.”

오늘 개봉 ‘빛나는 순간’ 주연 #해녀로 33세차 지현우와 멜로 #해외영화제 여우주연상 받아 #“고향 제주서 힐링하듯 찍었죠”

30일 개봉하는 영화 ‘빛나는 순간’(감독 소준문)에서 70대 제주 해녀 진옥이 되어 상대역 지현우(37)와 33살 차 로맨스에 도전한 배우 고두심(70)의 말이다. 1972년 MBC 5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연기인생 49년. 곽지균 감독 영화 ‘이혼하지 않은 여자’(1992) 이후 29년만의 멜로 연기다.

21일 서울 평창동 자택 근처 카페에서 만난 그는 ‘국민엄마’란 수식어 탓에 멜로물을 많이 못 한 한을 드디어 풀었다며 활짝 웃었다. “‘전원일기’ 22년 맏며느리상이어서 그랬는지 멜로는 안 주고 애기 딸린 엄마 역할로 가더라”며 “대한민국 감독들은 눈이 뼜냐고. 어떤 얼굴은 엄마 얼굴이고 어떤 얼굴은 연애할 수 있는 얼굴이냐 했다”며 그간의 서운함도 농담 반 털어놨다.

제주 출신인 그에겐 더욱 각별한 영화다. 각본을 겸한 소준문 감독은 14일 시사회 후 기자간담회에서 “검은 현무암 돌덩이 같은 제주 해녀들의 모습 이외에 숨겨진 감정, 들꽃 같은 모습이 있지 않을까 했다”면서 “사회적으로 상처 입은 세대들이 서로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사랑이 완성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만들었다. 고두심 선생님이 안 계셨으면 불가능했다”고 밝힌 바다.

“감독님이 머리에 매일매일 나를 그리면서 썼다더라고요. 제주도 하면 고두심이고, 고두심 하면 제주의 풍광이다. 이런 얘기에 나 못 해요, 할 사람 없지 않을까요?” 고두심의 말이다.

영화에서 배우 지현우가 연기한 방송 PD 경훈과 진옥. [사진 명필름]

영화에서 배우 지현우가 연기한 방송 PD 경훈과 진옥. [사진 명필름]

바다에서 숨 오래 참기로 기네스북에 오른 해녀 진옥은 서울에서 자신을 취재하러 온 방송 PD 경훈(지현우)을 처음엔 밀어내지만 바다에 빠진 경훈을 구해내며 그가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졌음을 알게 된다. ‘진옥 삼춘(가까운 손위 어른을 일컫는 제주말) 매니저’를 자처하며 동네 해녀들에게 곰살맞은 경훈이, 진옥은 점점 남달라진다. 경훈을 살려내려 했던 인공호흡이 나중엔 수줍은 입맞춤으로 발전한다.

나한테 이런 표정이, 싶던 장면은.
“경훈이 진옥 귀를 파줄 땐 정말 좋았다. 곶자왈 숲속에 드러누웠을 땐 나이 그런거 상관없고 사랑하는 사람과 있는 기분이었다. 근데 그때 ‘동백충(동백나무에 서식하는 차독나방 유충)’이 오른 것 아닌가! 옻 오르는 것처럼 얼굴만 빼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해녀) 고무옷 입는데 너무 쓸려서 매일 보건소 가서 주사맞고 약 먹으며 촬영했다.”(웃음)

“제주도에선 말하지 말라며 ‘속심헙서예’라고 하거든요. 연애하고도 너무 좁은 지역이어서 소문나면 사랑도 변하는 거라….” 그는 “잊어버릴 나이도 돼서 어릴 때 그 감정 막 끄집어낸다고 애 좀 먹었다” 했지만 상대역 지현우는 “선생님 얼굴에서 소녀가 보여 뭉클했다”고 돌이켰다.

극 중 사랑을 어떻게 해석했나.
“생과 사를 넘나드는 할머니로서 진옥은 못할 게 없다. 경훈의 그 아픔까지 보고 내 속에 뭔가 끄집어내서 쟤를 살릴 수 있다면 해줘야겠다. 그렇게 딱 마음먹는다. 그런데서 경훈은 안도하고 기대고 싶고. 그런 사랑 아니겠나.”

영화에 나오는 진옥의 젊을 적 흑백사진은 고전무용을 했던 열여덟아홉 무렵 그의 얼굴에 해녀옷을 입은 지금 몸을 합성한 것. 진옥의 물질 장면은 고두심이 직접 연기했다. 중학교 때 바다에 휩쓸려 겨우 살아나온 뒤론 물을 무서워했던 그다. “지금 뒷걸음질 치면 눈 감을 때까지 못할 것 같아 이 악물고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했어요. 독기를 품었죠. 제주도 고향 바다고, 해녀 삼춘들이 포진해 있는데 나 하나 안 건져주겠나, 했어요.” 잠수하다 숨을 틔어내는 ‘숨비소리’는 “40~50년간 평생 한 분들의 소리를 똑같이 내기는 어려워 삼춘들 소리를 (내 소리에) 입혔다”고 했다.

극 중 경훈과 제주 4·3사건을 떠올리는 장면에선 대본에 없던 대사가 줄줄 나왔단다. 진옥이 젖먹이 시절 부모가 총 맞아 죽어간 기억에, 자신의 딸을 바다에서 잃은 죄책감을 한데 쏟아낸 장면이다.

고두심은 “4·3은 뼈아픈 이야기다. 그 슬픔, 아픔을 다 감수해야 한 선조들이 안 됐고 애처로웠다. 1948년에 일어나고 조금 뒤 태어났으니 어릴 때 들은 것이 뼈에, 살에 콕콕 박혀있었는지…” 하고 되새겼다. “찍고 내가 어떻게 이걸 했지, 싶었다. 전 스태프가 올스톱해서 글썽이는 이도 있었다.”

이번 영화로 그는 지난 23일 이탈리아 로마에서 폐막한 아시안필름페스티벌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지상파 방송 3사 연기대상을 모두 받은 그의 해외 영화제 첫 수상이다.

삶에서 가장 빛난 순간으론 “아이를 잉태했을 때”를 꼽았다. 드라마에서 엄마 역할을 하느라 바빠 실제론 “빵점 엄마”라는 그는 최근 손자들이 보고 싶어 자가격리를 무릅쓰고 미국에 다녀왔다고 한다.

최근 배우 박인환이 발레에 도전한 tvN 드라마 ‘나빌레라’와 직접 출연한 ‘디어 마이 프렌즈’(2016) 등을 거론하며 “우리나라는 여배우들을 너무 조기에 역할에서 벗어나게 한다. 시장이 좁아서이겠지만 나이든 배우에게서 끌어낼 좋은 요소를 작가들이 많이 써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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