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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 曰] 죽은 푀가 에릭센을 살렸듯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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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2호 30면

장혜수 중앙일보 스포츠팀장

장혜수 중앙일보 스포츠팀장

2020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20)로 유럽, 아니 전 세계 축구 팬의 초여름은 한여름 같이 뜨겁다. 지난해 열렸어야 할 대회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1년 미뤄졌다. 16강 진출팀이 가려졌고, 지면 끝인 토너먼트에 들어갔다. 조별리그 최고 화제 팀은 단연 덴마크다. 최고 화제 선수도 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에릭센이다. 토트넘에서 손흥민과 함께 뛴 에릭센은 지난 시즌 이탈리아 인테르 밀란으로 옮겨 스쿠데토(세리에A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또 다른 트로피를 꿈꾸며 유로 2020에 출전한 그는 13일 조별리그 1차전 핀란드전 전반 40분,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심정지 상태에서 심폐소생술 등을 거쳐 의식을 되찾았다. 병원으로 옮겨진 뒤 상태는 호전됐고 일주일 만에 퇴원했다. 그의 응원에 힘입은 걸까. 2연패에 빠졌던 덴마크는 22일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러시아를 4-1로 대파했다. 골 득실로 조 2위가 돼 16강에 올랐다. 생사의 담장 위를 걸은 에릭센도, 탈락의 절벽 앞에서 기사회생한 덴마크도, 모두 기적을 경험했다.

선수들 사망 계기 응급체계 생겨 #산재 사망 헛되지 않게 지켜봐야

정말 기적일까. 아니다. 적어도 에릭센의 회생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그간 많은 축구선수가 경기 도중 쓰러져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카메룬 마르크-비비앙 푀는 2003년 6월 26일 국제축구연맹(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준결승전 도중 쓰러져 그대로 숨졌다. 28세였다. 헝가리 미클로스 페헤르는 2004년 1월 25일 포르투갈 프리메이라리가 경기 도중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24세였다. 스페인 안토니오 푸에르타는 2007년 8월 25일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경기 도중 그라운드와 라커룸에서 두 차례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흘 뒤 숨졌다. 22세였다. 같은 해 12월 30일 스코틀랜드 필 오도넬은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 도중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35세였다. 2012년 4월 14일 이탈리아 피에르마리오 모로시니는 이탈리아 세리에B 경기 도중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25세였다. 모두 심장마비가 사인이었다.

2000년 이후에 그것도 널리 알려진 사망사고만 추렸는데 이 정도다. 그 밖에도 많은 축구선수가 훈련장에서 또는 연습경기 도중 쓰러져 숨졌다. 그중 많은 수는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FIFA와 대륙별 축구 연맹, 그리고 각국 축구협회는 경기장에서 빈발하던 돌연사를 막기 위해 대책을 세워 시행했다. 대응 매뉴얼을 마련하고, 의료진 배치와 응급처치 장비 구비를 의무화하고, 심판 등에 심폐소생술을 교육했다. 국내에서는 어린 학생 선수를 대상으로 심장 이상 검사도 했다. 2011년 5월 8일 프로축구 K리그 제주 유나이티드 신영록이 대구FC전 도중 그라운드에 쓰러졌다. 경기장을 지키던 의료진의 심폐소생술과 신속한 병원 후송으로 소중한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이제 시선을 축구장 밖 세상으로 돌려보자. 지난달 29일은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 열차에 치여 숨진 김모군의 생일이자 5주기였다. 5년 전 김군은 불과 19세였다. 그 한 달 전인 4월에는 평택항에서 일하던 이선호씨가 컨테이너 철판에 깔려 숨졌다. 올해 그의 나이 23세다. 3년 전에는, 이제는 ‘김용균 법’이라는 법률의 별칭으로 기억되는 김씨가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숨졌다. 당시 그는 24세였다. 푀의, 페헤르의, 푸에르타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헛되지 않았다. 10년 전 신영록의, 최근 에릭센의 목숨을 구한 밑거름이 됐다. 김군의, 이선호씨의, 김용균씨의 안타까운 죽음을 헛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죽음이 다른 노동자를 살리는 밑거름이 되려면, 대책은 제대로 세워졌고 시행되고 있는지, 이제 우리가 잘 지켜보며 목소리를 내야 한다.

장혜수 중앙일보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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