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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호텔 지원이 저출산 대책? ‘뻥튀기’ 43조 저출산예산 실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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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문화체육관광부가 하는 ‘관광 활성화 기반 구축’은 국내 중소형 호텔을 토종 브랜드인 ‘베니키아’ 체인으로 묶어 운영하는 걸 지원하는 사업이다. 1등급부터 5등급까지 국내 호텔에 등급을 부여하는 등급결정제 운영비도 이 예산으로 보조하고 있다. 매년 100억원 가까운 예산이 지원됐고, 올해 예산은 125억8100만원으로 늘었다.

고용노동부의 ‘근로 조건 개선 지원’ 사업은 직장 내 괴롭힘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현장 점검과 교육, 예방 캠페인 등을 벌이는 내용이다. 2019년 직장 내 괴롭힘 금지 법령이 생기면서 예산이 배정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억8700만원에 이어 올해 17억9600만원 예산이 잡혔다.

저출산 예산 실상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저출산 예산 실상은.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21일 조명희 국민의힘 의원실이 국회예산정책처에 의뢰해 ‘제4차 저출산ㆍ고령사회 기본계획 기준 저출산 대응 사업 예산’을 분석했더니 관광호텔 지원, 직장 내 괴롭힘 예방같이 저출산 문제와 관련 없는 사업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합쳐 43조원에 이르는 저출산 예산의 실상이다. 16개 정부부처가 제출한 119개 저출산 대책 예산 내역을 점검한 결과다.

조 의원실에 따르면 올해 저출산 대책 예산(계획 기준, 지방비 제외)은 약 42조9313억원이다. 이 가운데 출산ㆍ난임 지원과 양육, 보육, 가족 복지 등 저출산 문제와 직접 관련된 예산은 13조9614억원(32.5%)에 불과하다.

정부가 규정한 저출산 예산에서 가장 비중이 큰 건 부동산 관련 임대ㆍ융자 사업이다. 24조935억원(56.1%)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저출산 대응 예산을 통틀어 단일 사업으로 제일 금액이 큰 것도 ‘주택 구입, 전세 자금 융자’(9조9000억원)였다. 신혼부부나 청년층을 타깃으로 한 대출 상품, 우대 금리 혜택 등을 포함하긴 하지만 소득이 상대적으로 덜한 무주택 세대주 전체를 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저출산 대응 용도로만 한정하기 어렵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저출산과 직접 연관이 없는 일반 고용 지원, 취업 훈련 사업(3조9183억원, 9.1%)도 많았다. 앞서 예를 든 직장 내 괴롭힘 예방 사업을 포함해 ▶한국잡월드 운영 지원 ▶소상공인 재기 지원 ▶고교 취업연계 장려금 지원 등이 대표적이다.

그나마 주거ㆍ고용 예산 ‘끼워 넣기’는 양호한 편이다. 넓게나마 저출산 문제와 관련지을 수 있어서다.

‘황당’ 저출산 예산 사업.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황당’ 저출산 예산 사업.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저출산과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 ‘황당’ 사업도 많았다. 해양수산 신산업 육성 및 기업 투자 유치 지원, 국가식품산업클러스터, 예술 창작 지원, 공공디자인 및 공예문화 진흥, 마약 치료 및 정신건강 증진 사업 관리 등이 그렇다. 게임 콘텐트 제작 지원, 만화산업 육성, 인공지능 융합인재 양성, 도서관 디지털화 사업 등에도 ‘저출산 대비’란 꼬리표가 붙었다.

직접 관련 없는 사업까지 저출산 대응 용도로 포장해 전체 규모를 부풀리는 정부 행태는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시행된 1~3차 저출산ㆍ고령화 기본계획 때도 같은 문제가 지적됐다. 기본계획 시행 첫해인 2006년 2조1000억원에 그쳤던 저출산 대응 예산이 지난해 40조2000억원까지 늘었다고 정부는 강조해왔지만, 원래 있던 예산을 저출산 용도로 돌린 사례가 적지 않았다. 수년간 같은 문제로 비판이 일어도 고쳐지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부실한 검증 체계와 예산 심사가 한 원인으로 꼽힌다. 저출산ㆍ고령사회위원회, 기획재정부, 각 부처가 정의하는 저출산 대책 범위가 넓다 보니 관점에 따라 판단이 다를 수 있는 간접 지원책까지 포함됐다. 부처가 관성적으로 저출산 대책을 내고 관행적으로 심사하는 과정이 해마다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명희 의원은 “일반 사업을 어떻게든 저출산과 연관 지어 포장하면 예산 통과가 쉽다는 각 부처 인식이 문제를 방치하는데 한몫했다”며 “예산 항목별로 효율성을 따져보지 않고 재정만 쏟아붓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지적했다.

출생아 1인당 1억5000만원 가까이 투입(지난해 기준 출생아 수 27만2400명, 저출산 예산 40조2000억원 기준)했다는 저출산 예산의 현실은 이처럼 과장된 측면이 많다. 최영 중앙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저출산 예산을 정부에선 많이 쓰고 있다고 얘기하고 싶겠지만 모호한 부분이 많다”며 “저출산 대응과 관련한 직접 비용, 간접 비용 등 분리해 논의하는 등 예산상 개념 정리가 선행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말했다.

올해 첫 출발을 하는 ‘제4차 저출산ㆍ고령사회 기본계획’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의 합계 출산율이 0.84명(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아이 수, 지난해 기준)으로 내려앉은 최악의 상황이지만 달라진 건 없다. 이번 분석 결과에서 알 수 있듯 4차 계획에 따른 첫 예산안(올해)에서도 저출산과 직접 관련한 사업 비중은 3분의 1에도 못 미쳤다.

지난해 말 4차 계획 발표 때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저출산 대응 예산으로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총 196조원을 투입하겠다”고 했지만 허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

저출산 대응 예산 추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저출산 대응 예산 추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안상훈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한 구체적 목표를 확정한 후 이를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정책이 선별되고 집중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자기네 예산이 줄어드는 게 싫은 각 부처 간에 정책 조정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며 “청와대나 관련 위원회가 능력 또는 의지가 없다 보니 각 부처가 백화점식으로 정책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라고 짚었다. 이어 안 교수는 “정책 조율 능력 또는 의지가 없어 나타나는 예산 (중복ㆍ낭비) 문제는 저출산뿐 아니라 한국 사회복지 예산 정책 전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최슬기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그렇게 많은 예산을 쓰고도 출산율이 내려갔다는 건 대책의 효과가 없었다는 의미”라며 “사업별로 저출산 문제 해결에 효과가 있는지 제대로 측정하고 평가하는 체계를 지금이라도 갖춰나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

세종=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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