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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와인인데 7만원 차이···불매운동 부른 와인 값의 비밀

중앙일보

입력

서울 도심의 한 대형마트 매대에 수입 와인이 진열돼 있다. 뉴스1

서울 도심의 한 대형마트 매대에 수입 와인이 진열돼 있다. 뉴스1

1만9000원 VS 9만원. 

와인에는 정가가 없는 것인가? 와인 시장이 커지면서 소비자들이 그동안 들쭉날쭉했던 가격에 대해 본격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1만9000원과 9만원은 스페인산 스파클링 와인인 '보히가스 그랑 리저브 엑스트라 브뤼'의 판매점별 가격. 똑같은 와인이지만 판매점에 따라 가격 차이가 7만1000원이나 난다. 와인 소비자들은 이같은 가격 차이의 배경에 수입사의 '와인 가격 조정'이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실제로 12만 회원을 가진 국내 최대 와인 커뮤니티인 '와쌉'은 소매점에 와인 판매가 인상 압박을 가했다며 몇몇 수입업체 리스트를 올려놓고 불매운동을 독려하고 있다.

"수입사가 가격 낮추지 말라 압박"

15일 와인 업계 관계자는 "와인 수입사의 '판매가 조정' 논란이 본격적으로 불거진 건 지난해 4월"이라고 말했다. 경기 김포의 한 와인 전문 판매점이 홈페이지에 고객들에게 ‘구매가를 공유하지 말아 달라’고 공지한 게 발단이라는 것이다. 이 판매점은 당시 "(와인 판매 가격이 공개돼) 수입사가 불가피하게 향후 특정 와인의 공급가를 인상하겠다고 해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해당 와인 수입사로 지목된 업체는 "판매가 조정을 압박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이후에도 와인 소매점들의 "일부 수입업체가 가격 인하를 압박한다"는 폭로가 이어졌다. 이때부터 와인 커뮤니티 회원들은 와인 구매 영수증을 촬영해 올리며 와인 가격을 공유하고 비싸게 파는 판매점이나 수입사를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서울 도심의 한 대형마트 매대에 진열된 수입와인. 뉴스1

서울 도심의 한 대형마트 매대에 진열된 수입와인. 뉴스1

"판매가 조정은 공공연한 비밀" 

와인업계에서는 "일부 와인 수입사들이 관행적으로 판매가를 조정하고 있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판매점에 소매 판매가의 하한선을 책정한 뒤 그 이하로 판매하면 공급량을 줄이겠다는 식으로 압박을 가한다는 것이다.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 와인가가 저렴한 것으로 소문난 대구의 한 마트 직원 김모(44)씨는 “지난달까지도 매장으로 (가격을 올리라는) 전화가 왔다”며 “기준 이하의 가격에 판매하면 우리한테 와인을 주지 말라고 납품사(도매상)에 압박을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와인 수입사 관계자도 “와인 소매점에까지 판매가 조정 행위를 계속하는 일부 수입사가 있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늘어난 판매점간 알력 다툼도" 

와인의 정가 논란은 소매점 사이의 알력 다툼 때문에 발생하기도 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예를 들어 소매 마진을 30%로 잡은 매장도 있고 10% 정도만 잡는 집도 있다"며 "그러면 비싸게 파는 가게가 싸게 파는 집에 대해 납품사나 수입사에 문제를 제기하곤 한다"고 말했다. 이럴 경우 수입업체들은 기존 다수의 거래처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싸게 파는 가게에 ‘판매가를 올리라’고 압박에 나선다는 것이다.

판매가 조정은 공정거래법 위반  

와인수입사가 판매점에 와인 가격 조정을 요구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다. 재판매 사업자에게 미리 정한 거래단계별 가격을 강제할 경우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도 있다. 가격 조정 압박 논란에 휩싸인 수입사들도 이 점을 알고 있다. 한 수입사 관계자는 “얼마 전 한 직원이 (판매가 조정 압박이라는) 위법 행위를 해 징계 조치를 했다”며 “(해당 직원은) 그게 위법인지 몰랐다. 추후에도 비슷한 일이 있을지 몰라 재발 방지 교육을 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몬탈치노의 한 바에 와인 병들이 놓여 있다. 본문과 관계 없는 자료 사진. AP=연합뉴스

이탈리아 몬탈치노의 한 바에 와인 병들이 놓여 있다. 본문과 관계 없는 자료 사진. AP=연합뉴스

"와인은 마진 복잡하고 유통은 까다로운 상품" 

와인업계에서 판매가 논란이 이는 건 와인의 복잡한 유통과 이윤(마진·margin)구조에서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와인은 보통 수입사→도·소매상→소비자 순으로 유통된다. 현행법상 와인은 수입신고가의 30%의 주세와, 주세액의 10%가 교육세로 부과된다. 또 여기에 수입 및 도소매 마진이 붙고, 최종 소비자 구매 가격의 10%가 부가가치세로 붙는다. 이에 따라 보통 수입신고가의 1.5~3배가 와인의 최종가로 결정된다. 여기에 와인은 또 유통 비용이 많이 드는 특징을 갖고 있다. 와인업계 관계자는 “와인은 냉장 보관과 배송을 해야 해 콜드체인이 필요하고 온도와 습도도 일정하게 유지해줘야 한다"며 "배송할 때 상하차도 까다롭고 개별 상품 단위로 취급해야돼 운송과 보관 비용이 많이 든다"고 설명했다.

"수입사의 고가 전략 폐기할 시점"  

여기에 그동안 전문 판매점들이 고가 전략을 취해온 것도 정가 논란이 발생한 배경이다. 다양한 와인을 값싸게 파는 대형마트에 맞서 와인 전문 판매점은 희귀한 와인을 고가에 파는 전략을 취해 왔다. 적은 물량만 판매해도 높은 이익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와인 시장이 커지면서 와인을 싼값에 판매하는 수퍼마트 등과 기존 와인 소매점과의 경쟁도 심화했고 와인 지식으로 무장한 소비자도 늘어났다. 특히 와인 소비자들은 실시간으로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본인이 구입한 와인 종류와 영수증을 올리며 가격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와인 커뮤니티 회원 이모(31)씨는 “가격 비교가 되면 결국 최저가 경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시장이 커진만큼 마진을 낮추며 가격 경쟁을 해야하는 데 일부 수입사가 되레 가격 담합을 하니 소비자가 나서 불매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생 시바르 지방 샤또 르 퓌 내부의 한 와인 셀러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프랑스 생 시바르 지방 샤또 르 퓌 내부의 한 와인 셀러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 1~5월 와인 수입액(2L 이하)은 1억9192만 달러(약 2144억원)로 지난해 동기보다 2배 이상 늘었다. 수입량은 2만6948톤으로 82% 증가했다. 국내 와인 수입유통업체 중에는 신세계L&B. 금양인터내셔널, 아영FBC, 나라셀라 등이 빅4로 꼽힌다. 이들 4개 업체의 시장 점유율이 약 80%에 달한다.

이병준 기자 lee.byungju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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