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각설탕'에서 여자 경마기수 역 임수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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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사진=안성식 기자

소녀는 단지 나이가 어린 여자를 뜻하는 단어가 아닌 듯하다. 많은 예술가가 이 말에서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무언가를 찾아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일지라도. 알퐁스 도데의 '별'이나 황순원의 '소나기'에서부터 현대 대중가수들의 노랫말까지 소녀는 순수함을 표현하는 단골소재다.

영화 '각설탕'(10일 개봉, 감독 이환경)도 마찬가지다. 주제곡으로 쓰인 가수 조동진의 '제비꽃'은 그런 정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너는 작은 소녀였고/머리엔 제비꽃…"이란 노랫말과 함께 흐르는 은은한 선율은 영화의 배경인 제주도의 푸른 바다.들판과 어우러져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영화의 소녀는 제주도 목장에서 어머니 없이 자라며 자신과 같은 처지의 망아지에게 모든 마음을 쏟는 시은. 임수정(26)은 작고 여려 보이지만 강한 의지력을 지닌 시은을 맡아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 영화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얘기라서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마음에 쏙 들었어요. 시은에겐 소년 같은 소녀의 이미지가 있는데 그런 면에선 제가 다른 여배우들보다 잘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죠. 사실 저는 조금 더 지저분하고 망가진 모습도 시도해 보고 싶었는데 감독님이 많이 말리셨어요."

'각설탕'에는 시은 못지않게 중요한 주인공이 있다. 천둥이란 이름의 말이다. 제목인 각설탕은 말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 제작진은 과천.부산.제주를 오가며 천둥을 캐스팅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천둥은 시은에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지만 그걸 아는 아버지는 시은 몰래 천둥을 팔아 버린다. 시은이 죽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경마 기수가 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은은 결국 기수가 되어 운명처럼 천둥을 다시 만난다.

"말은 이번에 처음 타 봤어요. 촬영 중 몇 번이나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죠. 다행히 뼈가 부러지지는 않고 근육을 다치는 정도였어요. 말이 빨리 달릴 때 내뿜는 강렬한 호흡 소리가 잊히지 않아요. 마치 '나는 달린다. 아무도 막지 마라'고 말하는 듯했죠."

영화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 기수의 세계에 대해서도 깊이 카메라를 들이댄다. 경마장에서 말을 달릴 때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그 뒤에는 어두운 구석도 적지 않다. 심지어 '바람막이'라는 이름으로 동료 남자 기수의 승리를 위한 승부조작에 동원되기도 한다. 시은은 조교사와 마주에게 여자라는 이유로 멸시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제 갈 길을 가는 당찬 모습을 보여준다.

"여성 기수는 워낙 힘들어 국내에 몇 명 안 된다고 해요. 과천에 있는 여성 기수 세 분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어요. 겉보기엔 평범하지만 기합소리에선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분들이었죠. 처음엔 서먹했는데 '주인공은 여러분이고, 저는 대역'이라고 말씀드리면서 몸에선 말똥 냄새를 풀풀 풍기니까 마음을 열고 도와주셨어요."

한편 올겨울에는 또 다른 모습의 임수정을 만날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과대망상증 소녀 역할을 맡아 현재 한창 촬영 중이다. "한 가지 연기보다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는 과정에 있어요. 언젠가 '악의 화신' 같은 강한 남성적인 역할도 해보고 싶고요. 그런 다음에 30대 초반이 되면 진정한 배우 임수정을 보여드릴 수 있겠죠."

글=주정완 기자 <jwjoo@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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