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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토론·봉사로 익힌 소프트스킬, 국제기구서 일하는 꿈 발판 됐죠

중앙일보

입력

“어릴 적 해외여행을 갔을 때 만난 외국인들이 한국을 모른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 내가 속한 세계보다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과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것이 정말 많다는 깨달음을 얻었죠. 그때부터 국제기구에서 다양한 배경의 전 세계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자기주도진로’ 인터뷰 39 #UNECE에서 일하는 백다은씨

2019년 2월부터 유엔 사무국(UN Secretartiat) 소속 *UNECE(United Nations Economic Commissions for Europe)에서 예산 및 재정담당 사무관(Budget and Finance Officer)으로 일하는 백다은(36)씨는 캐나다 회계사 자격을 가진 교포예요. 19세에 가족 모두가 캐나다에 이민을 가 회계분야로는 캐나다 최고 명문인 워털루대학(University of Waterloo)에서 회계학(Accounting)을 전공했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공부’ 대학에서 훈련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던 다은씨는 예고 입시에 실패했지만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국제기구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다른 꿈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죠. 주변에 국제기구 입사 관련 정보를 알려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2018년 9월 스위스 제네바대학교 '국제기구를 위한 MBA' 과정 입학 당시 처음으로 방문한 UN Geneva(Palais des Nations·유엔 제네바 본부) 정문에서 찍은 사진. 현재 다은씨가 일하는 건물이다.

2018년 9월 스위스 제네바대학교 '국제기구를 위한 MBA' 과정 입학 당시 처음으로 방문한 UN Geneva(Palais des Nations·유엔 제네바 본부) 정문에서 찍은 사진. 현재 다은씨가 일하는 건물이다.

“우선 주어진 일에 집중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성격은 내성적인 편이었지만 부지런하고 무엇을 하든 꾸준히 해나가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중·고교 시절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지만 스스로는 항상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청소년 시절엔 자신감이 많이 부족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신감 넘쳐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캐나다에 와서 이것저것 도전해보고 실패도 하고 성취도 해나가면서 조금씩 자신감이 생긴 것 같습니다.”

다은씨가 전공으로 회계학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예요. 동양인 여성으로서 외국에서 당당하게 자리 잡기 위해서는 공인된 전문직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고요. 또 수시로 UN의 채용공고를 확인하며 회계사 직업군에 채용문이 늘 열려 있는 것을 보고 회계사가 되면 유엔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는 데 유리할 것 같았죠. 다소 늦은 나이에 이민을 떠나 외국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일은 버겁고 힘들었지만 2006년 워털루대학에 합격했어요.

2014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아마추어 챔버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한 모습.

2014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아마추어 챔버 뮤직 페스티벌에 참가한 모습.

“캐나다에서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한국보다 수월한 편이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해야 할 공부의 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아서 졸업하기가 힘듭니다. 성적이 낮으면 다음 학년에 올라가는 게 불가능하고, 두 번 이상 실패하면 과를 바꾸거나 학교를 바꿔야 하죠. 서울 목동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낼 때 과외나 학원 등 사교육을 많이 받았는데 정작 혼자 공부하는 법을 익히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대학에 다니면서 제게 맞는 공부법을 찾게 됐고 그때부터 공부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던 것 같습니다.”

캐나다에서 회계학을 배우며 가장 힘들었던 점은 토론수업이었죠. 말주변이 없는 편인 데다 영어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했기에 자연히 수업시간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어요. 토론 외에도 수업 방식이나 내용이 한국의 교육과는 아주 달랐죠. 정답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공부하고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솔루션을 찾아가는 식으로요. 이민자인 다은씨뿐 아니라 캐나다 친구들도 감당하기 힘든 공부의 양 때문에 울면서 공부하기 일쑤였고, 공부를 포기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졸업 후엔 ‘자기와의 싸움이 힘들었지만 그걸 이겨냈기에 정신적으로 더 강해졌다’고 이야기하죠.

국제기구에서 일하려는 꿈을 치루기 위해 제네바로 떠나기 전, 캐나다 토론토에서 아마추어 뮤지션들과 현악 4중주 공연한 모습.

국제기구에서 일하려는 꿈을 치루기 위해 제네바로 떠나기 전, 캐나다 토론토에서 아마추어 뮤지션들과 현악 4중주 공연한 모습.

“대부분의 수업이 제가 답을 만들어야 하는 방식이라 주입식 교육에 익숙했던 저는 그게 참 힘들었죠. 지금 보면 대학에서 혼자 생각하는 방법, 그룹워크를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 리포트를 쓰고 발표하며 소통하는 능력 등을 중점적으로 배웠던 게 이후 회계사로 일할 때나 국제기구에서 일할 때 큰 자산이 된 것 같아요.”

자원봉사 활동으로 영어 실력과 경험 쌓아
다은씨는 워털루대학에서 총 4번의 여름방학 동안 회계사 사무실, 투자회사, 작은 엔터테인먼트회사, 정부기관 등에서 인턴십을 했습니다. 각기 다른 산업분야에서 다양한 일을 경험하면서 비즈니스 현장의 ‘일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죠. 석사 졸업 후 공인회계사(Charted Accountant) 시험을 통과해 캐나다 회계사가 됐고, 작은 회계사 사무실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점점 큰 회사로 이직했죠.

“일하는 틈틈이 바이올린 연주 경험을 살려 동네 오케스트라에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연주는 물론 3년간 오케스트라 이사회 멤버로서 재정·회계·운영 전반을 담당하기도 했죠. 또 자폐아를 돕는 비영리단체에서도 3년 정도 회계원(Treasurer)으로 봉사했어요. 봉사활동을 하면서 영어 실력과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 즉 소프트스킬을 익힐 수 있었던 것 같아요.”

2017년 캄보디아의 비영리단체에서 했던 봉사활동 마지막 날 함께 일했던 현지 친구들이 직접 준비한 음식으로 송별회를 열어줬다.

2017년 캄보디아의 비영리단체에서 했던 봉사활동 마지막 날 함께 일했던 현지 친구들이 직접 준비한 음식으로 송별회를 열어줬다.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커리어를 관리해온 덕분인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지인으로부터 캐나다 IIROC(Investment Industry Regulatory Organization of Canada)에 일자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해 당당히 합격한 거죠. IIROC은 한국의 금융감독원과 비슷한 일을 하는 곳으로, 캐나다의 5대 은행을 감사하는 막강한 기관입니다. 이곳에서 다은씨는 4년 반 동안 시니어 감사관으로 일하며 연간 실적 평가(annual performance evaluation) 때마다 가장 높은 등급을 받기도 했어요. 짧은 근무시간, 4주 휴가, 높은 연봉과 보너스 등 안정적이고 좋은 근무 환경을 갖춘 직장이었죠. 그러나 같은 곳에서 평생 일한다고 생각하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고교 시절부터 간절하게 원했던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꿈을 포기할 수도 없었죠.

“우선 내가 정말 국제기구에서 일할 수 있을지 확인해보기로 했어요. 한 달 휴가를 내고 캄보디아로 자원봉사를 갔죠. 'Cambodian Living Arts'라는 비영리단체의 재정부서에서 일하며 회계시스템과 재정 관리를 잘할 수 있도록 도왔어요. 그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제 의지를 확인했어요.”

다은씨는 캄보디아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캄보디아 전통 현악기를 배우기도 했다.

다은씨는 캄보디아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캄보디아 전통 현악기를 배우기도 했다.

캄보디아에서 돌아온 후 여러 국제기구에 지원서를 냈지만 합격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결국 퇴사하고 학생으로 돌아가는 모험을 하기로 결정했죠. 국제기구가 많이 모여 있는 스위스 제네바로 가면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 보고 1년 준비 끝에 2018년 9월 스위스 제네바대학교 국제기구를 위한 MBA 과정에 입학했어요. 교수진도 유엔에서 일했던 이들이 대부분인 이곳에서 다은씨는 국제기구의 종류와 기능에 대해 실질적으로 배울 수 있었고, 수업을 함께 듣는 동료들에게서 국제기구에 어떻게 입사했는지, 일하는 방법 등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죠.

학교를 다닌 지 3개월째, 같이 수업을 듣던 지인이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유엔이 채용공고를 냈는데 회계사 출신인 네가 적역 같으니 지원해보라’는 거였죠. 제네바에 거주한다는 점과 회계사 자격증, 그간의 경력 등을 감안해 기회가 주어졌고, 필기시험과 인터뷰를 무사히 통과해 유엔에 입사했어요. 국제기구 경험이 많은 지원자 수백 명을 제치고 다은씨가 합격할 수 있었던 데는 바이올린을 매개로 다양한 봉사활동을 했던 경험이 주효했죠.

다은씨는 현재 UNECE에서 예산과 재정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UN의 예산 책정 및 통과 과정은 꽤 복잡한데요. 우선 전년도에 주어진 예산을 바탕으로 ACABQ와 Fifth Committee라는 두 번의 청문회, 마지막으로 12월에 열리는 유엔 총회에서 모든 나라에게 승인을 받아야 통과됩니다. 다은씨는 UNECE의 한 해 예산안을 준비하는 일과 함께 UNECE의 수장(Executive Secretary)이 청문회에서 전 세계 회원국들의 질문에 답변을 잘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을 담당해요.

2018년 MBA 수업을 함께 듣던 친구들과 UN Geneva 투어 중 회의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2018년 MBA 수업을 함께 듣던 친구들과 UN Geneva 투어 중 회의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예산안을 준비하는 일은 스토리텔링에 가깝습니다. 이 예산을 어디에 쓸 것인지,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한지, 그 예산이 왜 필요한지 등을 설득력 있게 풀어야 하죠. 최종적으로는 회원국들의 동의를 받아야 하므로 단어 하나하나도 신중하게 선택해서 써야 합니다. 지금은 6월에 열릴 2022년 예산안에 대한 첫 번째 청문회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국제기구에서 다은씨가 일을 대하는 태도는 이전 회계사로서 일할 때와는 사뭇 다릅니다. 예산안을 준비할 땐 주말에도 일해야 할 정도로 바쁘고 힘들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조금이라도 세계를 더 낫게 만든다는 보람, 즉 인류 전체를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임하죠. 또 국제기구는 세계 각국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일하다 보면 매 순간이 도전과 영감을 받는 일상으로 채워지는 경험이에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고 분쟁지역에서 일해보겠다는 도전의식도 생겼죠. 그는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조언도 아끼지 않았죠.

“남보다 조금 늦었거나 못한다고 생각해서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공부든 일이든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 자기 페이스대로 꾸준히 해나가다 보면 반드시 원하는 기회를 얻게 될 겁니다. 항상 배우겠다는 열린 마음은 필수죠.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에 자신을 던져 보세요. 특히 국제기구에서 일하려면 외국어에 능통해야 함은 물론 국제 정세나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10대 때 다양한 책을 읽고 또 여러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글=김은혜 객원기자 sojoong@joongang.co.kr

※’자기주도진로’ 인터뷰는 '무엇이 되겠다(what to be)'는 결과 지향적인 진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겠다(how to live)'는 과정 중심의 진로 개척 사례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틀에 박힌 진로가 아닌,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가는 진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현재의 성공 여부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서 행복을 찾고, 남들이 뭐라 하든 스스로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멋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길’을 점검해 보시기 희망합니다.

◈UNECE(United Nations Economic Commissions for Europe): 전 세계 다섯 곳에 위치한 유엔 지역사무소 중 하나인 ECE는 유럽과 중앙아시아국가들의 경제협력을 증진하는 일을 하는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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