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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5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장원〉

헌책방
-조우리

신전의 유품들을 간신히 잡고 있는
양장본의 누떼들이 절판의 강을 건너
필사를 다시 시작할 그믐을 만들었다

세기의 판타지를 활줄로 매어두면
눈이 밝은 대낮 가고 뼛조각 같은 해거름
화물칸 고전을 싣고 직유로 에돌아온다

읽다가 취하다가 세계를 떠돌다 온
총명한 페이지가 눈시울을 건너올 때
일평생 장마 같았던 스테디셀러 한나절

◆조우리

조우리

조우리

1983년생. 2003년 6월, 2014년 8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글쓰기학원 강사

〈차상〉

몸詩
-최재선

시집(屋)에 사는 언어 詩로만 알았는데
ㅅ 字로 꺾이어서 제비꽃 이마쯤인
울 엄니 간당간당한 허리춤도 詩인 걸

오뉴월 가문 날에 뼈 풀린 풀잎같이
ㄱ 字로 돌아 굽어 휘어진 아버지 등
세월로 일필휘지한 표절 불가 詩인 걸

〈차하〉

그림 한 점
-김철주

해가 그린
오월 초록
붓끝으로 이는 바람

따스함
농도 더해
구도 한층 익어가고

한소끔
시간을 저어
빛과 어둠 지나다

〈이달의 심사평〉

계절의 여왕 5월, 짙어 오는 초록과 눈부신 꽃의 향연에 천지가 혼곤히 우거지는 달이다. 넘치도록 빛나는 계절의 생명력에 비해 이달의 응모작은 그 부피와 질이 좀 얇은듯하여 아쉽다.

이번 달 장원 자리에는 조우리의 ‘헌책방’을 앉힌다. 첩첩 세월을 품은 책방. 그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사유의 세상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인력이 돋보였다. ‘신전의 유품들’이라는 첫 도입부터 오래됨과 경건함의 냄새를 진하게 풍긴다. 절판된 양장본, 화물칸의 고전, 세계의 스테디셀러를 흑백 카메라로 훑는 섬세한 힘을 느끼게 한다. 각 수의 유기적인 연결성에 좀 더 고민했더라면 한 편의 시가 한 권의 고서적과 무게를 같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차상에는 최재선의 ‘몸시(詩)’다. ‘몸시’는 일찍이 정진규 시인의 저 유명한 산문시로, 시인이 만들어낸 고유한 조어(造語)라고 할 수 있고, 이미 성공한 시의 흔하지 않은 제목을 그대로 쓰는 것도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참신하고 세련된 작법이 눈길을 끌었다. 시각적인 효과를 노린 한글 자음 사용은 완전히 낯선 작법은 아니라고 해도 새로운 시도라는 점, ‘ㅅ’자로 간당간당해지고 ‘ㄱ’자로 굽은 어머니 아버지의 몸을 ‘표절불가 시’로 해석한 마지막 부분이 인상적이다. 세상 모든 자식들이 부모님께 바치는 사무치는 헌사로 읽혀진다.

차하에는 김철주의 ‘그림 한 점’이다. 제목 그대로 5월 한낮을 크로키하듯 잡아내어 작은 액자 속에 단정하게 앉힌 작품이다. ‘그린’ ‘붓끝’ ‘구도’ 등의 시어들을 적절히 활용하여 깔끔한 그림 한 점을 그려냈다. 감각적인 종장 처리 또한 이른바 종장의 미학을 잘 이끌어내었다.

김영수 박숙경 한영권의 작품들을 두고 선자들의 토론이 있었음을 밝히며 정진을 바란다.

강현덕, 서숙희(대표집필) 시조시인

〈초대시조〉

무실장터 사노(私奴)는
-김수환

사노는 2월 새벽 찬물 한 박 둘러쓴 뒤
때 절은 댕기머리, 손 한 번 쓰다듬고
애비로 다시 올테니 조금만 더 자거라

산에서는 나무꾼 들에선 농투산이
반상이니 붕당이니 그런 건 모르지만
몸으로 목숨 지키는 그 길밖에 길이 없고

하늘이 눈 감아도 용서 못할 빚이 있다
봉두난발 추슬러 흰 두건 불끈 지르고
죽어도 죽을 순 없어 그 빚은 갚아야겠다

◆김수환

김수환

김수환

1963년 경남 함안 출생. 2013년 시조시학 등단. 2018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당선. 영언 동인.

이것은 시가 아니다. 한 애비의 혈서요 왕조에 목숨으로 맞서는 출사표다. 사노란 백정과 함께 조선사회의 최하층민으로 초군을 더하여 세 마리 짐승이다. 그러나 이들이 1862년 2월 무실장터에서 일어난 진주농민혁명의 주역들이다.

진주시 수곡면의 탑 아래 기단에는 열나흘날 희생된 55인의 이름이 있다. 사노귀선 사노맹돌 사노순서 사노검둥, 그들은 성도 없고 글조차 모른채 죽기 위해 살았다. “애비로 다시 올테니 조금만 더 자거라”는 말은 그들이 자식과 한 약속이다. 세상에 이런 자장가는 아무데도 없고 끝내 지키지 못한 약속만 있다. “찬물 한 박 둘러쓴” 그들의 각성이 당시 위정자나 양반들의 학정과 폭력을 말하고 있다. 전설이 되고 말았지만 이 들불은 삼남으로 번져 115곳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30년 뒤 동학혁명의 단초가 되었다. ‘닷 되 배미’를 아는 사람은 흔치 않다. 족징 인징 백골징포 등의 늑탈에 겨울을 끝내 못이겨 논 한 배미를 쌀 닷 되와 바꿔먹고 유랑거지가 된 땅이 비단 어제의 조선뿐이겠는가. “하늘이 용서해도 용서 못할 빚”을 갚기 위해 “몸으로 목숨을 지키는 그 길”을 택했다. 이것은 시가 아니라 눈빛 형형한 오늘의 사관이 쓴 붉은 역사다.

최영효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e메일(choi.jeongeun@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응모편수 제한 없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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