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 시조 백일장] 4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장원〉

석화石花, 그 에피그램  
-이수이

박물관 뒷마당엔 지지 않는 꽃이 핀다
언 손을 비비며 온 새벽녘 그믐달이
돌탑 위 널린 통점을 조심스레 들추고

더께 걸친 저 남루도 저문 날엔 날개라서
주저 없이 걸쳐 입자 쓰여지는 상형문자
초록빛 눈먼 시간이 점자처럼 번지고

사람은 그 누구나 외로 선 작은 돌탑
끊임없는 비바람에 이름조차 잊혀도
한구석 우뚝 선 채로
꽃 피우며 살고 싶다

◆이수이

이수이

이수이

경북 영양 출생, 영양 문화원 백일장 산문부 장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중.

〈차상〉

황태, 몸을 풀다
-이종현

바닷속 기억들을 갑판 위에 부리고
비릿한 언어마저 얼음 속에 쟁였다
내설악 입적하던 날
눈꽃이 한창이다

파도에 몸살 앓던 흔적을 끌어안고
횡계리* 들어설 때 사나워진 눈보라
속울음 덕장에 내걸고
묵언수행에 들다

실눈 뜬 봄바람에 산문 밖 훔쳐보다
고의춤 뒤적이며 잔 가득 목젖을 적신,
속 쓰린 사내를 만났다
콩나물에 몸을 풀다

* 횡계리 : 강원도 평창의 황태 덕장

〈차하〉

할미꽃
-김정민

지난해 힘겨웁다
머리 풀고 가시더니
봄볕이 근지럽다
담 아래 슬쩍 오셔
자식 줄
멥쌀 한 그릇
고이 품고 졸고 있네

〈이달의 심사평〉

걱정도 불안도 잠시 놓고 꽃을 보는 4월. 목련과 벚꽃을 보내고 나니 연산홍과 철쭉이 또 왁자하다. 그것을 이은 것인가. 이 달 당선작들도 꽃들로 화사하다.

장원은 이수이의 ‘석화, 그 에피그램’이다. 박물관 뒷마당 돌탑에 낀 초록빛 이끼를 “지지 않는 꽃”으로 명명하였다. 탑은 영원히 죽지 않는 부처님을 모신 집, 부처님은 그 깊은 곳에서 오랜 세월 “돌탑 위 널린 통점”으로 내려앉은 사람들의 간절함을 읽는다. 그리하여 석화로 진리와 자비광명의 에피그램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유의 폭이 넓고 말의 직조 능력도 예사롭지 않다.

차상은 눈꽃을 배경으로 깔아놓은 이종현의 ‘황태, 몸을 풀다’로 정했다. 먼 바다에서 잡혀온 명태가 강원도 횡계리 덕장에서 황태로 재탄생되는 과정을 의인화하여 잘 묘사했다. 그런데 첫째 수와 둘째 수에서 이끌어낸 긴장감과 숙연함이 마지막 수에 가서 힘을 잃고 말았다. 시조의 힘은 각 장에서는 종장, 각 수에서는 마지막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차하는 김정민의 ‘할미꽃’이다. 꽃자루가 굽고 열매 겉을 덮고 있는 길고 하얀 털이 꼭 머리를 풀어헤친 할머니를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할미꽃. 발상의 신선함은 없으나 끝없는 모성을 “멥쌀 한 그릇”으로 본 눈썰미가 좋았다.

‘벚꽃, 석별’의 정호순은 1편만을 보내와 아쉬웠고, 몇몇 투고자들은 시조의 형식을 갖추지 못해 안타까웠다. 김영순, 김홍유, 노경호의 작품은 마지막까지 겨루었다.

시조시인 강현덕(대표집필), 서숙희

〈초대시조〉

무주구천동
-이정홍

구천동 가을 구천리 산빛도 달아나고
푸네기 떠나보내는 풀벌레 울음도 멎은
산그늘 한숨만 깊어 길을 찾아 헤매고 있다.

가랑잎 가을 한 뙈기 손에 쥐어 배웅하는
뒷바라지 늙은 산억새 훠이 훠이 날 저물면
구천동 구만리 하늘 달빛 그물에 글썽이고.

구천 계곡 시린 물에 발 담그고 앉았으면
뼈마디 사윈 골이 또 하나 구천인데
내 사랑 붉은 속울음 씨눈 하나 여물고 있다.

◆이정홍

이정홍

이정홍

경남 진주 출생. 경상국립대학교 퇴직. 2009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2015년 시집 『허천뱅이별의 밤』. 현대문학사조 문학상. 오늘의시조시인회의 회원.

무주는 본디부터 주인 없는 공산이며 구천동은 누구의 주권도 없는 인간의 해방구를 일컫는다. 그곳은 둘이 아닌 하나의 무주구천동이다. 의미를 좇아 반복해서 읊조리면 육신의 길을 찾아 헤매다 무위에 흡인되는 자아를 발견한다.

구천은 천상에도 있고 지하에도 있다. 둘 다 인간의 마지막 영혼이 안식하는 곳이다. 그런데 시의 진술은 느닷없이 “뼈마디 사윈 골이 또 하나의 구천”이라고 한다. 구중천도 아닌 또 하나의 구천은 어디일까? 셋째 수는 첫째와 둘째 수의 동일원리를 파괴하며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시적 전략이다. 그곳이 천상도 지하도 아닌 바로 “시린 물에 발 담근” 오늘의 현실 공간이다. 우리는 환상을 좇지만 실재는 이상보다 언제나 한 수 위에 있다. 그 완충지대를 시는 언어와 이미지, 이미지와 의미가 충돌하는 돌발적인 상황에서 생겨난 부정교합으로 새로운 정서가 생겨나고 외연을 확장한다. 꽃씨를 심어 놓고 우리는 꽃보다 기다리며 꿈꿀 때가 더 아름답고 행복하다. 그 해답으로 “내 사랑 붉은 속울음 씨눈 하나 여물고 있다”는 결구로 루시퍼를 만나도 두려워하거나 포기하지 말 것을 타이르고 있다. 씨눈 하나, 우리가 찾고 기다리는 메타버스의 세계가 그곳일지도 모른다.

최영효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까지 e메일(choi.jeongeun@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응모편수 제한 없습니다. 02-751-5314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