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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투자로 외교성과 낸 이례적 한·미회담…일자리 유출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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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한국의 선도적 기업들이 미국 투자에 대해 이익이 된다고 보고 있어 기쁩니다. 기업 대표님들, 여기 계시죠.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21일(현지시간) 한·미 정상회담 백악관 공동기자회견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할 것이란 예고는 없었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과 4대 그룹 대표단이 기쁨과 어색함이 섞인 표정으로 함께 일어서자, 바이든 대통령과 참석자들의 박수가 터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고맙습니다. 우리는 함께 대단한 일을 할 것"이라고 응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4대 그룹 대표단 등 경제사절단과 함께한 한·미 정상회담의 3박 5일 일정은 경영계에서도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미국의 외교·안보 정책에 협력함으로써 한국 기업의 수출을 돕는 이른바 ‘세일즈 외교’가 종전의 형식이었다면, 이번 회담에선 한국 기업의 미국 투자라는 유인책이 미사일 개발 제한 거리 해제 등 외교적 성과를 이끌어낸 정반대의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곽노성 동국대 명예교수(국제통상학)는 "중국을 제외했을 때 1위를 하고 있는 한국 배터리 기업과 시스템 반도체 분야 1등인 삼성이 경제사절단으로 함께 왔다는 것 자체부터 바이든 대통령에게 큰 메시지가 됐을 것"이라며 "기존 회담 때와 다른 한국 기업인의 위상과 역할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기업이 양국 동맹에 기여"

경영계에선 긍정 평가가 주류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3일 “한·미동맹이 안보를 넘어 경제동맹으로 나아갔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전경련은 “양국 간 반도체 투자와 첨단기술 협력, 공급망 협력 강화 약속을 매우 값진 성과로 평가한다”며 “이번 정상회담에서 한국 경제계가 양국 동맹에 기여한 것처럼 경제협력이 동맹 강화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도 적극 지원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국경영자총협회도 “이번 회담을 계기로 양국의 경제적 이익이 더욱 증진되고 동맹 관계가 강화하면서 국가적 이익과 가치를 포괄적으로 공유하는 한 단계 성숙한 관계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응원했다.

경제사절단에 박수를 쳐주는 바이든 미 대통령. [연합뉴스]

경제사절단에 박수를 쳐주는 바이든 미 대통령. [연합뉴스]

4대 그룹이 이번 회담을 계기로 밝힌 미국 투자 규모는 모두 44조원 정도다. 21일(현지시간) 미 상무부 주관으로 열린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 투자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왔다. 이 자리에서 삼성전자는 신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공장 확충에 170억 달러(약 19조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자동차는 미국 내 전기차 생산과 충전 인프라에 74억 달러(약 8조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SK이노베이션과 LG에너지솔루션이 현지 합작·단독 투자를 진행하기로 한 투자 규모는 합계 140억 달러(약 16조원) 규모다. SK하이닉스도 10억 달러(약 1조원)를 들여 실리콘밸리에 인공지능(AI), 낸드 솔루션 등 신성장 분야 혁신을 위한 대규모 연구개발(R&D) 센터를 세우기로 했다.

이를 통해 한·미 간 갈등에 대한 우려를 해소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은 23일 페이스북에 “원만한 선에서 주고받기였다”며 “양국 정상이 어느 상호 존중과 신뢰의 모습을 보인 것은 잘된 일”이라고 적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파트너십을 맺은 것도 수확 중 하나로 꼽힌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워싱턴에서 열린 ‘한ㆍ미 백신 기업 협력행사’에서 모더나와 손잡고 한국에서 백신을 생산하기로 했다. SK바이오사이언스가 경북 안동에서 생산하는 아스트라제네카와 노바백스 백신에 이은 삼성의 모더나 생산으로 ‘아시아 백신 허브’로 도약할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이밖에 미국 화학기업 듀폰이 반도체 소재 원천기술 기발을 위한 R&D센터를 한국에 세우기로 한 것도 경영계의 관심사다. 한국무역협회는 논평을 통해 “미국의 선진 기술과 한국의 제조 역량을 바탕으로 한 양국의 백신 동맹은 코로나19로 인한 전 세계적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SK의 미국 조지아 배터리 공장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오른쪽). 가운데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왼쪽은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주지사. [뉴시스]

SK의 미국 조지아 배터리 공장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오른쪽). 가운데는 최태원 SK그룹 회장, 왼쪽은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주지사. [뉴시스]

“소재 50% 한국서 수출” 

다만 대규모 미국 투자에 따른 일자리 유출 우려는 정부가 극복해야 할 부담이다. SK이노베이션 배터리 공장이 있는 조지아주에서 당선된 라파엘 워녹 상원의원은 22일(현지시간) 문 대통령 방문 행사에서 “이곳 공장과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일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며 “이곳은 첨단기술 시설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이 지역 사회 사람들에 대한 투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SK 조지아 공장 투자에 따른 고용 효과는 최대 6000명으로 예상된다. 정상회담 전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차지부(현대차 노조)는 회사 측의 미국 투자에 대해 "해외 공장은 현재 수준으로 충분하다"며 반대 입장을 냈었다.

이에 정부는 완제품 생산을 위해서 한국산 소재·부품 등의 미국 수출이 활발해질 것이란 점을 내세우는 분위기다. 정부 관계자는 “SK 조지아 공장 제조 장비의 90% 이상이 국산이고, 소재의 50% 이상을 국내에서 조달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미국 주도의 전기차 공급망에서 한국이 장기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선 현지 공장 진출이 필수적이라는 논리도 있다. 실제 문 대통령은 SK 조지아 공장에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자동차 시장을 보유한 미국에서 전기차 보급이 빠르게 늘어남에 따라 핵심 부품인 배터리의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한편 대한상의는 최 회장의 활동 내용을 강조하며 “미국 유력 경제단체와 싱크탱크 리더 등을 잇달아 만나면서 한국 경제를 세일즈했다”고 자평했다. 강석구 상의 국제본부장은 “대미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해 양국 경제계 간 우호적 협력 관계를 이끌어내는 데 주력했다”며 “양국 간 교역, 투자, 공동 R&D 등 민간 차원의 다양한 경제 협력 방안을 계속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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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욱 기자 isotop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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