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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이 재능”…80번 두드린 이경훈 우승 문 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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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이경훈은 이번 대회에서 아이언으로만 출전 선수 평균보다 7.3타를 벌었다. [EPA=연합뉴스]

이경훈은 이번 대회에서 아이언으로만 출전 선수 평균보다 7.3타를 벌었다. [EPA=연합뉴스]

이경훈(30)이 17일(한국시각) 미국 텍사스주 매키니의 크레이그 랜치 골프장에서 열린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 AT&T 바이런 넬슨에서 우승했다. 이경훈은 최종라운드 6언더파를 쳐, 합계 25언더파를 기록했다.

PGA투어 바이런 넬슨서 첫 1위 #일본 거쳐 3년 만에 미국 1부행 #7월 출산 아내에게 트로피 선물 #“아내에 조금이나마 빚 갚은 듯”

요즘 PGA 투어의 라이징 스타 샘 번스(미국)가 선두인 데다, 조던 스피스(미국)도 선두권을 달렸다.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이경훈이 3타 차로 여유 있게 우승했다. 이번 대회가 그의 PGA 투어 80번째 출전 대회였다. 이번 우승으로 내년 마스터스와 다음 주 PGA챔피언십 등 메이저대회 출전권도 얻었다. 페덱스 랭킹은 29위로 뛰었다.

이경훈은 2, 3, 4번 홀에서 버디를 잡아 역전했다. 이어 6, 8번 버디로 2위권과 간격을 벌렸다. 우승에 이르기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런 드라마는 없었다. 3타 차로 앞선 16번 홀에서 퍼트를 하려다가 번개에 놀란 게 가장 큰 위기로 보였을 정도다. 여기서 보기를 했지만, 다음 홀에서 티샷을 핀 1m 옆에 붙여 3타 차로 도망갔다. 사실상 이 지점에서 승부가 갈렸다.

박세리는 투포환과 골프를 했다. 이경훈도 어릴 때 잠깐 투포환 선수를 했다. 그는 “운동을 그만두고 나서 살이 쪘다. 살을 빼려고 시작한 골프와 사랑에 빠졌다”고 소개했다. 비교적 늦게 시작한 데다 재능도 출중하지는 않았다. ‘괴물’ 장타자도 아니었고, 쇼트 게임 ‘귀신’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내 재능은 노력하는 자세”라며 열심히 훈련했다.

7월 출산을 앞둔 부인 유주연(왼쪽)씨와 함께 포즈를 취한 이경훈. [로이터=연합뉴스]

7월 출산을 앞둔 부인 유주연(왼쪽)씨와 함께 포즈를 취한 이경훈. [로이터=연합뉴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다. 일본 투어에 진출해 4년간 2승을 거뒀다. 2015년 이경훈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수입도 보장된 일본을 떠났다. PGA 투어 진출을 목표로 미국 2부 투어로 향했다. 그를 아는 이들 중에는 “무모하다”고 여긴 사람도 있었다.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통해도, PGA 투어에서 성공하기에는 그의 재능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종목을 불문하고 프로 스포츠의 마이너리그에서는 눈물 젖은 빵을 먹는다고 한다. 골프 2부 투어는 생각보다 더 어렵다. 단체 스포츠는 팀에서 입혀주고, 태워주고, 눈물에 젖더라도 빵은 준다. 골프는 차비도, 캐디피도, 출전비도 모두 선수 부담이다. 게다가 미국 2부 투어에는 괴물처럼 공을 멀리 보내는 선수들 천지였다.

대회 출전을 위해 미국 전역을 누비는 건 물론, 남미까지도 가야 한다. 하지만 상금은 미미하다. 2부 투어 15개 대회를 치른 뒤 번 돈이 5000달러(약 550만원)에 불과했다. 이경훈은 “저렴한 호텔에서 자다가 벌레에 온몸이 물려 시뻘겋게 부어오르기도 했고, 남미 대회에서는 전화도 터지지 않아 고생했다”고 회상했다.

그런 가운데에도 이경훈은 국내 주니어 선수들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대회를 거르지 않고 열었다. 밤늦게 내린 공항에 식당이 없어 라면에 즉석밥을 말아먹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가 몸무게가 7㎏이나 불기도 했다. 이경훈은 2017년 말 두 살 연상인 유주연 씨와 혼인 신고했다. 이듬해부터 투어에 함께 다녔다. 부인과 다닌 첫해에 2부 투어 생활을 마감하고 1부 투어로 올라갔다. 미국 생활 3년 만이었다.

이경훈은 PGA 투어 진출 뒤 2년간은 출전권만 겨우 유지했다. 이번 시즌 들어 실력을 발휘했다. 2월 피닉스오픈에서 2위를 했다. 그리고 이번 우승으로 2022~23시즌까지 출전권을 얻었다. 이경훈은 퍼트를 어려워했다. 지난 시즌 퍼트 순위가 129위였고, 올해는 178위다. 그런 그가 이번 대회에서는 출전 선수 평균보다 퍼트로 4.3타(9위)를 벌었다. 이경훈은 “퍼터를 바꿔서 잘 됐다”고 했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안다.

이경훈은 “7월에 아버지가 되는데, 아이가 생긴 뒤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 성적이 안 나 속상해하면 아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방법이 없다’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골프도 잘 몰라 무척 답답했을 텐데, 이번 우승으로 조금이나마 빚을 갚은 것 같다”며 좋아했다.

이경훈의 우승 모습을 최경주(51)와 강성훈(34)이 옆에서 지켜봤다. 이경훈은 최경주, 양용은(49), 배상문(35), 노승열(30), 김시우(26), 강성훈, 임성재(22)에 이어 PGA 투어에서 정상에 선 8번째 한국 선수다.

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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