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살아 있는 경제 관료의 아이디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정치 과잉의 시대라지만 그렇다고 과연 모든 정책 결정이 오로지 정치인의 몫일까.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진작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의 대표작 『고용·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의 마지막 구절, 아마 가장 많이 인용된 문장일 것이다.

‘변양호 신드롬’의 그 변양호가 #쓰는 얘기만 하는 정치에 물었다 #누가 독이 든 성배를 마실 것인가

“경제학자와 정치철학자의 아이디어들은 옳건 그르건 통상 이해되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이 아이디어들이 세계를 지배한다. 어떤 지적 영향에서도 벗어나 있다고 믿는 실무가들도 이미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인 경우가 많다.”

최근 5명의 전직 경제 관료가 의기투합해 책 한 권을 냈는데, 장안의 화제다. 『경제정책 어젠다 2022』. 10개월 남은 대선을 앞두고 경제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제대로 된 경제 담론 대신 포퓰리즘만 외치는 대선주자들의 머릿속을 바꾸고 싶다는 의욕이 행간에 넘친다.

최고참이자 집필을 주도한 변양호(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는 포털에 이름을 검색하면 ‘변양호 신드롬’이 자동 완성 단어로 뜨는 그 변양호다. 나랏일을 적극적으로 한 죄 아닌 죄로 그는 갖은 고초에 옥살이까지 한 뒤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한때 “다시는 나랏일에 ‘나’자도 꺼내지 않겠다”며 입을 닫았다. 경제부처 후배들이 복지부동을 최고 덕목으로 삼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그런 그가 임종룡(전 금융위원장), 이석준(전 국무조정실장), 김낙회(전 관세청장), 최상목(전 기획재정부 1차관)을 다독여 책을 낸 것은 타고난 ‘애국 본능’과 몸에 밴 ‘적극 행정’을 빼곤 얘기할 수 없다. 책의 메시지는 간명하다. 변양호는 “경제는 벌고 쓰는 것이다. 쓰는 건 쉽지만 버는 건 훨씬 어렵다. 쓰는 얘기만 해선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고 했다. 방점은 크게 세 가지. 임종룡은 “버는 건 규제 완화와 공정 경쟁, 쓰는 건 부(負)의 소득세를 통해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임종룡은 이 셋을 하나라도 빠지면 굴러갈 수 없는 ‘세발자전거’에 비유했다.

이 책의 특징은 디테일이다. 탁상공론은 아예 없다. 할 얘기만 했다. 딱딱하고 건조하지만 숫자와 대안이 있다. 예컨대 특히 화제가 된 ‘부의 소득세’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의 구상에서 출발한다. 일정 소득에 미달하는 사람 모두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부자에게도 똑같이 돈을 주자는 이재명식 기본소득의 단점인 역진성을 피할 수 있고 비용도 훨씬 덜 든다.  “부자에겐 세금, 빈자에겐 현금”이란 시대정신과도 맞는다. 대상은 3370만 명, 전체 인구의 67%다. 재원은 97조1000억원. 각종 공제를 축소하고 복지 예산을 통합해 구조조정하면 가능하다. 어느 예산을 얼마나 줄일지도 조목조목 따져놨다. 머리와 실전 경험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제대로 쓰이려면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4년 전에도 비슷한 책이 있었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의 『경제 철학의 전환』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친분도 두터운 그가 디테일을 담아 쓴 책이다. 케인스식 모델을 접고 슘페터식 혁신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구체적인 대안을 조목조목 내놨다. 많은 이가 무릎을 쳤다. 진보의 담론이 되기에 충분했다. 채택됐다면 부동산 정책 실패로 4년 뒤 대통령이 사과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대선 직전에 출간돼 공론화 시간이 없었던 데다 대통령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데도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운명은 어떨까. 책의 아이디어를 실천하려면 재벌과 노조는 물론 복지 기득권을 설득하고 온갖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 나라를 통째로 바꾸는 일이 될 것이다. 엄청난 역풍을 각오해야 한다. 웬만한 정치인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 필자 중 한 사람은 “독이 든 성배, 누가 감히 마시겠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왕관을 쥐려는 자, 때론 흔쾌히 독배를 들이킬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