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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계급의 징표여선 안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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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염태정 기자 중앙일보
염태정 EYE 디렉터

염태정 EYE 디렉터

랍스터를 군대에서 처음 먹어봤다. 1989년 카투사로 근무하던 경북 포항의 미군 부대에서다. 30년도 더 된 일인데 아직도 처음 랍스터를 먹던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하얀 속살의 붉은 랍스터와 두툼한 스테이크, 따끈한 통감자가 한 세트였다. 자주는 아니고 6~7개월에 한 번 정도 먹었던 듯하다. 평소 식단도 괜찮았다. 당시 근무하던 부대는 전체 인원이 60명 정도였는데 전문 조리사가 식사를 준비했다. 식당에선 장교·사병 구분 없이 편한 대로 앉아 밥을 먹었다.

‘똥국’에 김치…이게 K-급식인가 #형식적 사과 말고 책임자 처벌해야 #급식사태 병영문화 변화 계기로

아들이 제대한 지 보름쯤 됐다. 군대에서 휴대전화를 쓸 수 있어서 자주 통화했다. 좋은 얘기보다는 군 생활의 어려움·불합리에 분통을 터뜨릴 때가 많았다. 아들 얘기를 받아 주기보단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다. 휴대폰까지 쓰지 않느냐. 옛날보다 엄청 좋아졌다. 잘 견뎌라’고 했다. 요즘 줄줄이 터져 나오는 군대의 부실 급식, 코로나19 격리 상황을 보면 시대 변화를 모르는 답답한 말을 조언이라고 한 거였다. 부실급식 얘기를 며칠 전 물었더니 첫 반응이 ‘그런 거 흔해’였다. 밥이 맛없어 PX에서 ‘맛다시’라는 걸 사서 자주 비벼 먹었다고 했다.

군 장병의 한 끼 급식비가 고등학생 수준도 안 된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올해 장병의 하루 식사 비용이 8790원, 한 끼 2930원이다. 웬만한 커피 한 잔 값도 안 된다. 고등학생 한 끼 급식비(3625원)의 80% 수준이다. 단가가 낮긴 하나 지금의 한 끼 급식비 3000원이 멀건 된장 국물에 두부 몇 개 들어간 ‘똥국’과 김치, 한 젓가락도 안되는 계란찜만 줘야 하는 수준은 아니다. 조리의 상당 부분을 병사가 하고, 임대료를 내는 것도 아니다. 식재료도 싸게 공급받는다. 어딘가에서 급식비가 새거나 임무를 방기하는 건데 형식적인 사과만 있을 뿐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병사들이 좋아하는 메뉴를 10~20g 더 준다, 저울을 비치해 정량 배식을 확인하겠다는 걸 대책이라고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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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은 권력의 징표였다. 이병헌 주연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면 궁녀들이 광해군의 밥상 앞에 고개 숙이고 앉아 있다가 그가 남긴 밥을 맛있게 먹는다. 양반은 상민과 함께 밥을 먹지 않았다. 식사 권력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나 사회 전반적으로 밥의 불평등은 옅어지고 있다. 공공기관 대부분 간부 식당을 없애고 있다. 법원행정처는 얼마 전 일부 법원에 있는 법관 전용 식당 또는 간부식당을 없애라고 권고했다. 조남관 검찰총장 직무대행도 총장 전용 식당과 간부 식당을 모든 직원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해병대를 비롯해 군대에서도 장교 식당이 많이 없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일선 부대에 장교용 식당이 꽤 있다. 물론 장교와 사병이 같은 식당을 쓰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높은 사람과 밥 먹으면 아무래도 불편하고, 하고 싶은 말 맘대로 하기도 어렵다. 중요한 건 사병과 장교 식사의 품질, 공간의 쾌적성은 동일해야 한다는 거다. 밥이 계급·권력의 징표가 되어선 안 된다. 계급이 이등병이지 사람이 이등병은 아니다. 사병을 바라보는 인식과 태도가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이번 부실 급식 사태를 보면, 여전히 사병을 ‘졸(卒)’로 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숙자에게 제공하는 것보다 부실한 급식, 1000원짜리 빵에 작은 초 하나 꽂은 생일상 사진, 양치·세면 금지가 나올 수 없다.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에 한 해 국방 예산이 52조원에 달하는 나라다. 문재인 정부 국방개혁 2.0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군 장병 처우 개선 아닌가. 국방부는 올해 예산을 설명하며 ‘장병의 기본적 생활 여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선진 병영문화를 정착시키겠다’고 밝혔다. 말은 이런데 ‘똥국’에 김치 조각이라니. 병사는 화나고 부모는 울화통이 치민다. 이게 K-급식인가.

군대 급식은 건강을 유지하고 사기를 진작해 최상의 전투력을 발휘하게 하는 핵심 요소다. 수십만 명의 식사를 준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메뉴의 종류·변화에 제약도 많지만 개선해 나가야 한다. 국방부는 급식 단가를 더 높이고 민간 조리사 기용을 확대하겠다고 한다. 적극 추진해야 한다. 물리적인 개선과 함께 사병을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 계급이 다를 뿐 사병이나 장교나 인격은 같다. 이런 인식이 뿌리내리기까진 상당한 시간과 교육이 필요할 거다. 부실 급식 파동이 말뿐인 사과에 그치지 않고 병영문화 변화의 계기가 돼야 한다.

염태정 EYE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