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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코로나 이긴 이스라엘…후쯔파(뻔뻔함)와 공동체의 힘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이스라엘 메론산 압사참사 뒤 시민들이 헌혈하러 텔아비브 라빈광장을 찾고 있다. 사진 텔아비브시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이스라엘 메론산 압사참사 뒤 시민들이 헌혈하러 텔아비브 라빈광장을 찾고 있다. 사진 텔아비브시

유대인에게는 특유의 ‘후쯔파(뻔뻔함)’ 문화가 있다. 텔아비브 도심에서 겪은 일이다. 가뜩이나 막히는 일방 통행로에서 차를 멈추고 여유 있게 짐을 옮기거나, 뒤차가 5대나 서 있어도 “주차해야 한다”며 후진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 이스라엘 시민들은 기다려주거나 못 이긴 척 차를 뒤로 물려준다. 한국 같았으면 ‘텔아비브 진상’이란 제목이 달린 고발 글이 SNS나 커뮤니티 게시판을 뜨겁게 달궜을 일이다.

참사 뒤 임시 헌혈소 찾은 시민들 

뻔뻔하지만 공동체는 살뜰히 챙기는 것이 또한 유대인의 전통이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각)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 메론산에서 ‘라그 바 오메르’(Lag B’Omer)날을 기리는 종교행사 중 40명 넘게 숨지는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즉시 곳곳에 임시 헌혈소가 마련됐다. 텔아비브 시청사 앞 라빈 광장에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온 시민, 자전거를 타다 들른 시민들이 기꺼이 자신의 피를 나누기 위해 줄을 섰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크리스마스나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듯, 이스라엘에서는 초정통파 유대교인 하레딤이 아니어도 라그 바 오메르 날에는 마을 축제가 열린다. 평소 친한 가족을 초청해 양이나 쇠고기를 굽는데, 이때 주변의 어려운 이웃과도 함께 한다. 안식일에는 예루살렘 내 트램과 같은 대중교통도 운행을 멈춘다. 식료품점도 문을 닫는다. 종교인은 회당을 찾고, 세속인(신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인)은 주로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유대(紐帶)감을 쌓는다. 이스라엘 외교부 다힐라 뉴만 인사교육개발국 담당은 “과거부터 이어져 온 끈끈한 공동체야말로 유대인의 힘”이라고 말했다.

‘라그바오메르요’날인 4월 29일(현지시간) 이스라엘 예루살렘 네베야하코프 마을에서 주민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주변의 어려운 이웃도 함께 한 자리다. 임현동 기자

‘라그바오메르요’날인 4월 29일(현지시간) 이스라엘 예루살렘 네베야하코프 마을에서 주민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주변의 어려운 이웃도 함께 한 자리다. 임현동 기자

'백신은 아이언돔'

후쯔파 문화와 공동체 의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에도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백신 제조사들을 상대로 직접 설득에 나섰다. 화이자 백신을 하루라도 빨리 도입하려 앨버트 불라 화이자 CEO(최고경영자)에게 서른 차례나 전화했다. 새벽 3시에도 수화기를 들었다. 뻔뻔함과 집요함은 불라 CEO에게 감명을 줬다고 한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백신 부자국가가 됐다. 내년에 쓸 1500만회 분의 화이자·모더나 백신도 이미 구매계약을 마쳤다. 백신 ‘보릿고개’는 없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백신이 코로나19의 ‘게임 체인저’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고 한다. 일찌감치 백신으로 승부수를 띄운 것은 유대인에게 내재한 냉철한 현실분석이 바탕이 됐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최고 방역책임자인 나흐만 아쉬 텔아비브대 교수의 말처럼 백신은 아이언돔(이동형 미사일 방어체계)이 됐다.

이리나 리안 히브리대 아시아학부 교수는 “유대인은 홀로코스트 같은 상황을 많이 겪었는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힘이 응축됐고 날카로운 분석과 사고로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창의적인 해결책을 위해 더 깊은 의미를 끊임없이 찾는다고 한다.

빠른 검사(Test)·역학조사(Trace)·치료(Treat) 등 3T 전략으로 대표되는 K-방역과 국산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에 집중하다 실기한 한국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2일(현지시간) 이스라엘 텔아비브 독립기념관에서 한 시민이 관람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2일(현지시간) 이스라엘 텔아비브 독립기념관에서 한 시민이 관람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마스크 벗고 경제에 숨통 트여  

이스라엘의 성인 접종률은 90%가 넘는다. 현지 교민들은 “타인에게 코로나19를 옮기지 않으려 접종하게 됐다”고 말했다. 공동체의 발현이다. 덕분에 코로나19 상황은 상당히 안정됐다. 이스라엘 보건부에 따르면 지난 10일 기준 코로나19 신규환자는 37명이다. 최근 일주일간 일평균 신규환자는 48명으로 집계됐다. 이제 이스라엘 보건당국은 실내에서 마스크를 벗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이미 지난달 18일부터 실외 노 마스크다. 덕분에 경제도 숨을 쉰다. 내수가 살아나고, 23일부터는 해외 단체 관광객도 받는다. 이스라엘 중앙은행은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3.5%→6.3%로 상향 조정했다.

쇼핑에 나선 이스라엘 시민들이 4월 30일(현지시간) 오전 예루살렘 마밀라 쇼핑거리를 걷고 있다. 거의 마스크를 벗었다. 임현동 기자

쇼핑에 나선 이스라엘 시민들이 4월 30일(현지시간) 오전 예루살렘 마밀라 쇼핑거리를 걷고 있다. 거의 마스크를 벗었다. 임현동 기자

I-방역 모범됐다 

이스라엘은 4월 마지막 주 100명 안팎의 신규 환자가 나왔다. 당시 한국의 일부 네티즌들은 한국의 인구가 이스라엘보다 5배 이상 많으니 600명가량의 신규 환자는 ‘선방’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여전히 ‘5인 이상 사적 모임 금지’ ‘밤 10시 이후 영업제한’ 등을 유지해야 하는 실정이다. 단순 비교는 의미가 없다. 한때 K 방역이 세계의 모범이었듯, 지금은 I(이스라엘)-방역이 모범이다.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예루살렘=김민욱 기자 kim.min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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