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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국민과 마주해야 할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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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정민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민 논설실장

이정민 논설실장

문재인 정권은 사과에 인색하다. 집권 4년이 되도록 국민은 대통령의 사과다운 사과를 받아보지 못했다.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다.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다”고 한 취임 때의 약속도 허언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임기 1년 남겨둔 문재인 정권 #사과다운 사과는 한번도 없어 #백신 실패 인정, 대국민 사과로 #민심 추스를 모멘텀 만들어야

“송구스럽다”는 말은 여러 번 했다. 그게 사과를 뜻하는 것이었다면, 형식상 사과를 하긴 한거다. 올해 들어서만도 한국주택토지공사(LH) 사태와 부동산 가격 폭등, 추미애-윤석열 갈등에 대해 사과했다. 문 대통령은 1월 신년사를 통해 “주거 문제의 어려움으로 낙심이 큰 국민께는 매우 송구한 마음”이라고 했다. 신년 기자회견에선 “투기 차단에 역점을 뒀지만, 부동산 안정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시인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문 대통령은 집값 폭등의 원인을 불어난 유동성과 1인 가구 증가 탓으로 돌렸다.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부정했다. 5억 원대 하던 서울 아파트 평균값이 불과 4년여 만에 9억 원대로 급등했다. 집없는 ‘벼락거지’가 양산됐다. 이말 저말 갖다 붙여도 정부의 무능이 빚은 정책의 실패라는 건 자명하다. 그러면 정책을 바꾸겠다고 해야지 “세대수가 61만이나 늘었기” 때문이라고 퉁치고 지날 일이 아니다. 바른 처방이 빠진채 허공을 맴도는 메아리가 국민에 감동을 줄 리 없다.

매사 이런 식이다. 추-윤 갈등에 대해선 “검찰개혁의 과정에서 갈등이 부각된 것 같아 국민에게 정말 송구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검찰총장보다 검찰 선배인 법무부 장관, 또 검찰 선배인 민정수석을 통해서 아무런 갈등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시대가 더 좋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보다 건강하게 발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비판받을 일은 아니라는 데 방점이 있다. 조국 사태에 대해 “국민들에게 갈등을 주고, 분열시킨 점에 대해서는 송구스럽다”면서도 “조국 전 장관이 겪은 고초만으로도 크게 마음의 빚을 졌다”(지난해 신년 기자회견)고 했던 때와 판박이다. 무결점·무오류라는 정신 승리법에 집단 최면에 걸린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이런 인식이 드러날 때마다 국민과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지난주 갤럽 여론조사(4월27~29일)에서 대통령 지지율은 29%였다. 심리적 마지노선이라는 30%마저 무너졌다. 둑에 구멍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구멍이 커지면 대통령 의지대로 국정을 끌고가기 어렵게된다. 당청 지지율 역전 현상(민주당 33%)이 고착되면, 차기를 노리는 주자들의 조급증을 부를 수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해 지지율이 10%대로 곤두박질치자 ‘정권의 황태자’로 불리던 정동영 후보로부터 “독선과 오만에 기초한 권력을 가진 자가 휘두르는 공포정치의 변종”이란 막말을 들어야 했다. 당시 비서실장이던 문 대통령은 쫓겨나다시피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주군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두 번 다시 반복되지 말아야 할 한국 정치의 불행이자 비극이다.

강성 친노 돌격대들이 있었지만 떠나는 민심을 붙들지 못했듯, 친문 강경파들이 대통령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측근과 참모들이 올리는 틀에 박힌 보고서에서 눈을 돌려 민심과 마주해야 하는 이유다. 갤럽조사에서 드러난 대통령 지지율 하락은 부동산(28%)과 코로나(17%)대처의 실책 때문이다. 부동산 정책의 경우 부정평가가 81%에 달했는데, 특히 18~29세에선 4%만 ‘긍정적’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KPI(핵심성과지표)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에서 낙제점을 받은 거다.

오르기보다 어렵다는 하산길, 하지만 실책을 만회할 길이 아주 막힌 건 아니다. 우선 백신 정책의 실패부터 깨끗이 사과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다. 미국과 유럽 국가에선 마스크를 벗고 콘서트와 여행이 재개되고 있지만, 우리는 ‘백신 가뭄’으로 접종 연기와 중단이 이어지고 있다. 거리두기와 5인이상 사적 모임 금지등 국민의 일방적 희생만 강요하는 방역 정책이 1년 넘게 이어지면서 민심은 폭발 직전이다. 그런데도 ‘백신 도입과 접종계획 원활히 진행’ ‘백신 확보의 불안정성 해소’와 같은 발언이 잇따른다. 희망적 사고로 정신 무장을 한다고 풀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국민의 부화만 돋을 뿐이다.

더 늦기 전에 이쯤에서 방향을 틀어 물줄기를 바꿔야 한다. 우선, 백신 실패를 인정하고 국민들 앞에 진솔한 사과부터 하는 게 순서다. K방역 성과에 취해 한때 판단이 흐려져 백신 수급의 장애를 초래했다는 점을 진솔하게 인정해야 올바른 대안이 나온다. 그렇지 않고 무오류라는 착각과 신화에 빠져 잘못은 덮고 성과를 부풀리는 희망고문 방식으론 달아난 민심을 추스르기 어렵다.

며칠 뒤면 취임 4주년 기념일(10일)이다. ‘부동산 만큼은 자신있다’ 거나 ‘일상회복의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자화자찬이 아니라 진솔한 마음으로 국민과 마주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4년전 취임사에서 문 대통령은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 평범한 시민이 돼 이웃과 정을 나눌 수 있는 대통령’을 소망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정민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