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하경 칼럼

레임덕을 마주하는 문 대통령이 결심해야 할 일

중앙일보

입력 2021.05.03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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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대통령의 권력은 취임 직후가 가장 세다. 광장을 뒤흔드는 환호에 격무의 피로도 사라진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여론과 민심은 사나워지고 마침내 레임덕을 맞는다. 단임(單任)의 제왕적 대통령이 겪는 숙명적 사이클이다.

입안의 혀처럼 굴었던 내 사람들도
제 살길 찾기 위해 거리 두려 할 것
퇴임 후 정치적 상징? 갈등만 초래
‘나’를 버려야 국익·통합에 이른다

임기 1년을 남긴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30% 아래로 떨어졌다. 공정·정의·평등에 열광했던 2030 세대마저 싸늘하게 등을 돌려 청와대가 청년 TF를 만들었다. 정권의 체력이 고갈된 것이다. 화이자 백신은 ‘적기(適期) 도입 실패’로 1차 접종이 중단됐다. “(백신이) 빨리 도입됐고, 충분한 물량이 확보됐다”는 연초 대통령의 장담은 거짓말이 됐다. 입안의 혀처럼 굴었던 내 사람들도 이제는 거리를 두려 할 것이다. 불면(不眠)의 밤이 기다리고 있다.

양산 주민들의 반대로 청와대가 사저(私邸) 공사를 중단한 것은 민심과의 불화(不和)를 상징한다. 주민들은 “평화로운 일상이 파괴되는 사저 건립을 중단하라”며 수십 개의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문 대통령은 “대통령은 살기만 할 뿐 처분할 수도 없는 땅”이라며 “모든 절차는 법대로 진행하고 있다”고 했지만 통하지 않는다.

부동산 폭등으로 ‘벼락거지’가 된 사람들이 가슴을 치고 있는데 웬만한 축구장 크기의 땅을 사들여 집을 짓겠다는 건 대통령답지 않은 결정이다. 부동산 실정(失政)의 총체적 책임자인 대통령이 ‘영농 경력 11년’이라며 농지를 구입한 뒤 대지로 형질변경까지 하게 만든 당시 비서실장과 경호처장은 자격 미달이다.

퇴임한 대통령은 범부(凡夫)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順理)다. 존재감을 과시하고 정치적 상징으로 남기를 꿈꾸는 순간 소모적인 갈등은 불가피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퇴임 후 봉하마을에 널찍하게 터를 잡는 바람에 구름처럼 지지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장면이 광우병 사태로 초조해진 집권세력의 가혹한 수사와 무관했다고 할 수 있을까. 양산 사저 부지는 봉하마을보다 훨씬 넓다. 결코 지혜로운 선택이 아니다.

무(無)에서 시작해 무로 돌아가겠다는 평상심은 남은 임기를 잘 마무리할 수 있는 심리적 기반이 될 수 있다. 정의감으로 독재 정권에 맞서다 두 차례나 구속되고 징역까지 살았던 문재인이다. 이런 전력(前歷) 때문에 판사 임용 전에 정보기관의 회유성 면접을 치렀는데, 놀랍게도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며 소신을 지키고 출세를 포기한 사람이다.

그 후 대형 로펌에서 고액 연봉과 해외 유학까지 제시했지만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인권변호사의 길을 선택한 순수한 성정(性情)이 그의 강력한 매력이다. “착한 문 변호사”는 모든 이들의 공통 기억이고, 역설적으로 그를 국정 최고 책임자로 만들었다. 그가 아직도 ‘무욕(無慾)의 정치인’이라면 취임 전에 살았던 홍은동 빌라 같은 누옥(陋屋)으로 귀환하는 것은 어떨까. 사저 구입 과정의 비리로 경호처장 기소까지 겪은 전직 대통령의 오욕(汚辱)을 반복해서야 되겠는가.

체면을 의식하고 사욕(私慾)을 챙기려면 화(禍)를 부를 수 있다. 압도적인 권력과 정보를 가졌다고 스스로를 무류(無謬)의 절대자로 착각해 국민을 무시하면 안 된다. 전직 대통령들의 비극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얼마 전 청와대는 문 대통령을 “북조선의 개”라고 비방하는 내용의 전단지 뭉치를 뿌린 30대 남성을 모욕죄로 고소했다. 문제가 있다. 극단적 과장(誇張)의 언사도 참고 들어주는 것이 민주주의다. 언로(言路)가 봉쇄되면 공동체가 분열되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국민은 얼마든지 권력자를 비판할 자유가 있죠. 그래서 국민이 불만을 해소할 수 있고 위안이 된다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닌가요”라고 한 적이 있다. 이젠 권력에 익숙해져서 생각이 달라진 것인가.

대통령 개인의 소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의 안전과 이익이다. 21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쏟아낸 발언은 위험하다. 화이자·모더나 개발국인 미국을 겨냥해 “백신 개발국의 자국 우선주의와 사재기”라고 비판했다. 불과 하루도 안 돼 백악관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6000만 회분을 외국에 지원하겠다”고 했다. 중국 보아오 포럼 영상메시지에서도 “개발도상국에 백신 기부 등 코로나 지원 활동을 펴는 중국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당장은 속이 시원할지 모르겠지만 백신 종주국 미국의 협조를 끌어내야 할 시기에 부적절한 발언이다.

정치인은 분열된 민심을 통합하기 위해 되도록 반대자의 의견을 수용해야 한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박원순 전 시장의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을 계속하기로 한 결정은 모범답안이다. 그는 “이미 34%의 공정이 진행됐고, 250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됐다”며 “현재 계획된 안을 바탕으로 하되 역사성과 완성도를 더 높여 광장사업을 조속히 완성하겠다”고 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의 반대 의견을 거둬들이고, 여당 주도의 시의회에 협치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힘이 빠지는 임기 말의 대통령은 나를 버리고 통합의 길을 가야 한다. 그래야 헌법의 수호자로서 공동체를 지킬 수 있다. 문 대통령이 순리를 따르겠다는 결심을 하기 바란다.

이하경 주필·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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