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향은의 트렌드터치

현실이 된 가상, 가상이 된 현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이향은 성신여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교수

이향은 성신여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교수

게임을 하다가 배가 고파진 유저가 게임 안에서 햄버거를 주문하자 곧 현실세계의 집으로 햄버거가 배달된다. 게임 속에서 나의 아바타가 주문을 했는데, 내가 먹을 진짜 햄버거가 집으로 배달돼 온다. 가상세계와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세상을 그린 SF영화 ‘매트릭스’가 떠오른다. 먼 미래일 것 같았던 이 가상세계 이야기가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가상 공간에서 가장 핫한 아이돌의 콘서트나 세계적인 영화감독의 신작을 즐기고, 내 얼굴을 인식하여 만들어진 아바타가 사고 싶었던 명품 스니커즈를 사 신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는 등 현실의 일상을 실감나게 즐기는 삶, 우리는 메타버스(Metaverse)의 시대를 살고 있다.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혼합 #장비는 간소화, 실감력은 향상 #가상세계 원주민 Z세대 놀이터 #모방 넘어 현실세계 대체할수도

방탄소년단(BTS)이 신곡 ‘다이너마이트’의 안무영상을 최초로 공개한 곳은 유튜브가 아닌 3인칭 액션슈팅(TPS) 게임 ‘포트나이트’였다. 게임 속에서 전투를 하다가 ‘파티로얄 모드’를 선택하면 소셜공간으로 바뀌는데, 가상세계 속 대형 무대에 BTS가 등장한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역시 신작 ‘테넷’의 예고편을 이 가상공간의 스크린에서 공개했다. 무대 앞에 모여든 관중은 게임을 즐기는 유저의 아바타들이다. 1992년 『스노우 크래쉬』라는 소설에 처음 등장한 개념이자 단어로 ‘초월’을 뜻하는 메타(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가 결합되어 현실을 초월한 가상세계로 통용되고 있는 메타버스는 뜨거운 시장이다.

국내의 대표적인 메타버스 서비스 ‘제페토’에는 얼굴인식 기능을 통해 제작된 3D아바타로 활동하는 가입자 수가 전세계에 2억명이 포진되어 있다. 이 메타버스 공간에서는 게임 뿐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각종 사회 활동들이 구현된다.

지난해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전당대회를 화상으로 개최하며 디지털 전환을 꾀했던 바이든 캠프는 닌텐도 게임 ‘동물의 숲’ 안에 선거 캠프를 차리고 선거유세를 펼쳤다. UC버클리 대학은 코로나로 등교할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 마인 크래프트라는 게임의 가상공간에 캠퍼스를 똑같이 재현해 놓고 졸업식을 열었다.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가상세계에서 이뤄지는 수업에 참여해 출석을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에 졸업식에 참석한 캐릭터들은 수업을 들은 실제 학생이기도 한 셈이다. 국내 IT기업 네이버 역시 코로나로 재택근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들을 제페토에 개설된 사옥으로 출근시켰고, 3D맵 상의 회사로 출근한 신입사원들은 동기들과 만나 미션을 수행했다.

트렌드터치 5/3

트렌드터치 5/3

너무나 빠른 기술의 진화와 산업의 성장속도 탓에 유저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메타버스는 게임을 넘어 현실과의 접점을 만드는데 공을 들이고 있다. 세상을 떠난 딸아이를 가상으로 만나 머리를 한없이 쓰다듬는 엄마를 보며 눈물을 흘려야 했던 모든 부모들은 ‘혼합현실(MR)’이라는 기술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사용되는 VR장비들은 점점 더 간소화되고 실감력은 더 높아지고 있다.

메타버스가 급부상하는 이유는 바로 이 무궁무진한 확장성과 수익창출력이다. 아바타가 게임 속 무대에서 펼친 공연으로 하루만에 2000만달러를 벌어들이는가 하면, 잘나가는 명품브랜드 구찌는 아바타들을 위한 버추얼 컬렉션을 공개했는데, 순식간에 구찌의 버츄얼 컬렉션을 사 입은 캐릭터들의 콘텐트 40만개가 생성되었다. 미국의 메타버스 게임 로블록스(ROBLOX)는 게임 안에서 유저들이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올리는 플랫폼을 제공하는데, 이를 이용해 만든 게임을 다른 사람들이 이용할 때마다 돈을 벌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었다. 실제로 로블록스 내에서 게임을 개발하는 사람은 약 200만 명 정도로 이 중에 20%, 그러니까 40만명은 가상세계로 출근하는 전업 가상세계 고용자가 되었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해졌지만 모바일 쇼핑이 어색하고 서툴던 때가 있었다. 혁신기술은 늘 그렇게 약간의 충격과 불안감을 주면서 준비되지 않은 우리에게 찾아왔다. 메타버스 기반 신기술과 서비스는 소셜과 게임 분야를 넘어 교육, 부동산, 의료, 헬스산업까지 뻗어 나갈 것이다. 가상세계는 현실세계를 모방하고 현실세계는 가상세계의 지원을 받는 현실과 가상 사이, 이 모호한 경계지역에서 뛰어노는 Z세대들에 의해 미래로의 본격적인 이동은 시작되었다.

이향은 성신여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