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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이’와 어린이날

중앙일보

입력 2021.05.03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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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채혜선 기자 중앙일보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민망한 언어의 역사를 고백한다. 요리에 서툰 나는 주부인 친구들에게 “요린이(요리+어린이)”라며 레시피(조리법)를 물어보고는 했다. 주식에 첫발을 떼고 선 만나는 사람마다 “주린이(주식+어린이)”라고 소개하고 다녔다. 초보를 뜻하는 ‘○린이’를 그저 유행처럼 쓰이는 신조어로 받아들여서다.

이 말에 차별과 편견이 깃들어있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다. 서울문화재단이 지난달 23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준비한 온라인 캠페인이 논란 속에 서둘러 끝난 일을 접하고 나서다. 재단 측은 “첫 도전을 시작했다면 ‘○린이’ 인증사진을 공유해달라”고 했다가 일부 네티즌에게 뭇매를 맞았다. “‘○린이’는 어린이가 미숙하고 불완전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지난해 어린이날 비눗방울 놀이를 즐기는 어린이들. [연합뉴스]

지난해 어린이날 비눗방울 놀이를 즐기는 어린이들. [연합뉴스]

“성장 가능성이 있는 존재” 등과 같은 여러 항변이 쏟아졌지만, ‘○린이’라는 말에 ‘수준이나 단계가 낮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여물지 못한 모습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라서다. 그러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어린이는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이르는 말”을 뜻한다. 아뿔싸. 나는 ‘대접해야 할’ 어린이를 낮춰 부르는 결례를 저질러왔다.

어린이날이 이틀 남았다. 1953년 첫 번째 어린이날은 지금처럼 5월 5일이 아닌 노동절인 5월 1일이었다고 한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은 그 이유를 “어린이날을 노동자 계급의 기념일인 ‘메이데이’와 같은 날로 정함으로써 정치적 해방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어린이도 노동자처럼 ‘해방’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린이는 해방됐을까.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하는데, ‘○린이’라는 표현이 남발되는 현실을 떠올려본다면 답은 쉽게 나온다. 이미 일상 속에 자리 잡은 ‘노 키즈 존(No Kids Zone)’도 어린이를 속박하는 것 중 하나다. 많은 곳이 어른만의 왕국을 만들어 어린이를 차단하고 있다. 식당이나 극장 등에서 민폐인 사람 수를 따져본다면 어린이보다는 어른이 압도적으로 많을 텐데 말이다. 이를 두고 김소영 작가는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이렇게 의문을 가졌다. “우리나라 출생률이 곤두박질친다고 뉴스에서는 ‘다급히’ 외치고 있다. 그런데 어린이를 환영하지 않는 곳에 어린이가 찾아올까? 너무 쉬운 문제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어린이날 가사가 서럽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 세상은 1년 365일 가운데 딱 하루, 어린이날만이 어린이 세상이라는 거다. 364일은 어른의 것이니 어린이가 사는 세상은 어린이날이 만들어진 지 100년이 다 돼가도 바뀐 게 없다. 그렇다면 어린이날은 ‘부끄러운 어른들의 날’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다.

채혜선 사회2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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