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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스 색종이 오리기, 이브 생로랑 드레스로 재탄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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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4호 22면

[영감의 원천] 패션이 된 그림

앙리 마티스의 ‘다발’(1953) 종이 컷아웃을 세라믹 설치로 구현한 작품. 미국 LA카운티뮤지엄(LACMA)에 있다. [사진 문소영]

앙리 마티스의 ‘다발’(1953) 종이 컷아웃을 세라믹 설치로 구현한 작품. 미국 LA카운티뮤지엄(LACMA)에 있다. [사진 문소영]

루마니아 민속 의상 풍의 블라우스, 알록달록한 식물 무늬의 아플리케(천 조각을 오려 붙인 것)로 장식된 드레스….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1936~2008)의 1980년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 의상) 쇼는 옷으로 재탄생한 앙리 마티스(1869~1954) 작품의 향연이었다. 이 패션과 미술의 만남은 아주 생소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생로랑은 이미 65년에 피에트 몬드리안의 삼원색 직각 추상화를 발랄한 일자형 원피스로 만들어서 명성을 떨쳤고, 또 “언제나 미술 작품을 동경하고 거기에서 영감을 받는다”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춤추듯 꿈틀거리는 그림 속 패턴 #생로랑, 움직이는 색채 의상 제작 #독특한 재료로 활기 발랄한 표현 #세계 유명 패션 거장들에게 영향 #마티스, 직접 발레 의상 만들기도

오히려 마티스는 생로랑에게 좀 늦게 소환된 감이 있었다. 왜냐하면 마티스야말로 가장 패션 친화적인 20세기 미술 거장으로 꼽을 만하기 때문이다. 그가 패셔니스타였다는 것은 아니고(그의 사진들로 보면 오히려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의 그림에 무늬가 화려하고 인상적인 옷, 특히 민속 의상을 입은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기에 그렇다는 얘기다. ‘마닐라 숄’(1911), ‘노랑 드레스’(1929~31), ‘루마니아 블라우스’(1940)처럼 아예 의상이 그림 제목인 경우도 적지 않다. 게다가 마티스는 1920년 러시아 발레단(발레 뤼스)의 무대 의상도 담당했다. 그때 그가 한 말을 보면 왜 그가 의상과 패턴에 관심이 많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의상을 움직이는 색채로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물이 내게 주는 감정을 그린다”

마티스의 ‘다발’에 영감을 받은 이브 생로랑의 이브닝 드레스 (1980, 사진 왼쪽), 마티스의 ‘달팽이’에 영감을 받은 이브 생로랑의 이브닝드레스 (1980,사진 오른쪽).[사진 핀터레스트 캡처]

마티스의 ‘다발’에 영감을 받은 이브 생로랑의 이브닝 드레스 (1980, 사진 왼쪽), 마티스의 ‘달팽이’에 영감을 받은 이브 생로랑의 이브닝드레스 (1980,사진 오른쪽).[사진 핀터레스트 캡처]

실내외 풍경화, 정물화, 초상화부터 신화 그림까지 아우르는 마티스의 회화를 보면 언제나 음악적 흐름이 강하게 느껴진다. 색채들이 명암과 음영을 무시하고 평면적으로 배열돼 있으면서 리드미컬한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티스가 말년에 집중한 컷아웃, 즉 과슈로 색칠한 종이를 여러 형태로 오린 뒤 핀으로 고정해 구성한 작품에서 극대화된다. 생로랑은 80년 오트 쿠튀르 쇼에서 마티스의 컷아웃 중 ‘다발’과 ‘달팽이’로부터 영감을 받은 드레스를 내놓았다. 마티스가 색칠한 종이를 오려 붙였듯, 알록달록한 새틴 조각을 오려 붙여 “움직이는 색채의 의상”을 만든 것이다.

컷아웃 이전부터 마티스에게 있어서 그림이란, 작가의 감정을 담은 색채를 배열해 화폭 안에다가 하나의 새롭고 독립적인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니 르네상스 이후부터 모던아트 이전까지 서구 화가들이 추구한 것, 즉 ‘어떻게 하면 명암법과 원근법을 잘 구사해 3차원 현실 세계를 2차원 화폭에 그럴듯하게 재현해낼까’와 정면으로 대치되는 셈이었다.

이것은 마티스가 많은 영향을 받은 인상주의 및 신인상주의와도 다른 길을 간 것이었다. 빛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게 보이는 사물의 색채를 객관적으로 그려내는 것은 마티스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마티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문자 그대로 테이블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게 일으키는 감정을 그린다.”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 소장된 마티스의 컷아웃 ‘달팽이’(1953).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 소장된 마티스의 컷아웃 ‘달팽이’(1953).

색채에 대해서는 이런 말을 했다. “색은 단순할수록 내면의 감정에 더 강력하게 작용할 수 있다. 가령 파랑은 강렬한 보색을 동반할 때 날카로운 징 소리처럼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빨강이나 노랑도 마찬가지다. 화가는 필요한 경우에 적절한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1905년 살롱 도톤(Salon d’Automne) 전에서 마티스와 그의 친구들의 그림을 본 평론가 루이 보셀은 그 격정적 색채가 징 소리보다 야수의 부르짖음처럼 들렸는지 이들에게 ‘야수파(Fauvism)’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이렇게 주관적이고 강렬한 색채의 사용은 ‘붉은 실내’ 연작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디저트; 붉은 조화’(1908)나 ‘붉은 아틀리에’(1911)를 보면, 짙은 빨간색이 화면 대부분을 지배한다. 어느 집 벽과 테이블과 바닥이 이 그림들처럼 실제로 온통 빨간색이겠는가. 그럼에도 마티스가 이 모든 것을 붉게 칠한 이유는 이 실내가 그에게 불러일으킨 감정과 활기와 생명력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마티스는 “색채 못지않게 선도 중요하다”고 했다. 꿈틀거리는 선을 통해서 색채가 춤을 추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남달리 춤을 좋아하고 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본다. 표현력이 풍부한 움직임, 율동감 있는 움직임, 내가 좋아하는 음악 같은 것을…춤은 내 안에 있다.” 이 말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 그의 대표 걸작인 ‘춤’(1909)이다. 이 그림 속 인물들은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는데, 우리나라에 강강술래가 있듯 이것이야말로 동서고금 존재해온 가장 원초적인 춤일 것이다. 이런 춤의 형태에서, 또 벌거벗은 인물들의 건강한 붉은 피부에서, 그리고 겅중겅중 뛰며 돌아가는 그들의 팔다리와 몸통에서, 약동하는 힘과 거칠고 순수한 즐거움이 느껴진다. 그 폭발적인 원시적 에너지는 폴 고갱의 타히티 그림들도 따르지 못할 정도다(참고로 마티스 또한 타히티에 다녀왔고 영감을 받았다).

죽음 앞두고도 멈추지 않은 변주

‘춤’처럼 동적이고 원시 신화적인 그림뿐만 아니라 실내 정경 그림들에서조차 약동감이 느껴지는데, 이는 벽면과 가구의 패턴, 또 등장인물의 옷 무늬가 춤추듯 꿈틀거리며 반복되기 때문이다. 마티스는 모로코를 방문하고 이슬람 미술의 식물 패턴과 기하학 패턴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자신의 실내 풍경화에 응용해 지중해 연안의 아르카디아(전원적 낙원)적 삶의 활기와 즐거움을 구현했다. 유럽 화가들을 관통해온 아르카디아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화가 중 하나로 자주 뽑히곤 한다.

하지만 마티스도 인간의 운명인 ‘병마와 노쇠’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일흔을 넘긴 41년에는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는 “작품을 마무리하기 위해 3~4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의사들에게 부탁했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이어서 그는 13년을 더 살 수 있었다. “그 무시무시했던 수술은 나를 완전히 소생시켰을 뿐 아니라 나를 철학자로 만들었다.”

노쇠와 후유증으로 그는 붓을 제대로 들 수 없어 그림을 그리기 힘들게 되었지만, 그는 그것을 한탄하며 누워 지내는 대신 자신이 그전부터 조금씩 실험해오던 컷아웃을 본격적으로 창작했다. 그래서 평론가 로버트 휴즈의 말처럼 “대부분의 화가들이 과거의 작품을 우려먹거나 붓을 놓고 임종을 기다릴 시기에 마티스는 아방가르드의 흐름에 다시 들어가 세련된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작가가 말년에 새로운 재료를 써서 만든 새로운 작품이 제2의 전성기 작품으로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것은 마티스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거장 피카소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마티스의 컷아웃 작품들은 발랄하고, 생의 환희가 넘치고, 또 그 독특한 재료 때문에 디자인에 적용되기 쉬워서, 생로랑뿐만 아니라 발렌티노, 이세이 미야케, 비비안 웨스트우드 같은 기라성 같은 디자이너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그래도 마티스와 가장 관련이 깊은 이는 여전히 생로랑인 것 같다. 생로랑이 세상을 떠난 뒤 2009년에 열린 그의 소장품 경매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것이 마티스의 정물화 ‘노란 앵초, 푸른색과 분홍색의 테이블보’이기도 했으니까. 이 그림은 3590만 5000유로(당시 환율로 약 700억원)에 팔렸다. 생로랑은 불과 21살에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고 20대 후반에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해 명성을 떨친 천재 디자이너였지만, 군 복무 시절의 트라우마와 지속적인 성공에 대한 압박감, 그리고 그것을 잊기 위해 복용한 코카인에 중독돼 평생을 시달렸다. 그럴수록 생로랑은 마티스의 굴하지 않는 삶의 기쁨을 동경하고 그의 기운과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
미술전문기자. 서울대 경제학부 학·석사, 런던대 골드스미스컬리지 문화학 석사, 홍익대 예술학과 박사 과정 중. 저서로 『그림 속 경제학』(2014), 『명화독서』(2018), 『광대하고 게으르게』(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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