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님 정말 국난 상황에서 중책을 맡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대구 지역 60대 상인)
지난 27일 대구의 상가 밀집지역인 동성로에 검은 정장 차림에 워킹화를 신은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나타나자 그를 알아본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정말 고생하셨다”, “잘 되셨으면 좋겠다”는 인사말에 정 전 총리는 웃는 얼굴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등의 말로 응대했다. ‘미스터 스마일’은 그의 오래된 별명이다.
코로나 방역 인연 대구서 대권 행보 #“난 심리적으론 아직도 중대본부장” #영남과 인연 강조 “안동서 군 생활”
동성로 상인 김모 씨(56)는 “코로나 대유행 시국에서 정 전 총리가 대구에 내려와 있어 안도했다”며 “실제로 보니 푸근하고 또 훨씬 젊어 보인다”고 말했다. 정 전 총리는 지난해 2월 대구에서 신천지 관련 코로나 확진자가 속출하자 3주간 대구에 상주하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진두지휘했다.
중앙일보는 이날 정 전 총리의 대구 지역 일정에 동행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계명대 동산병원 예방접종센터였다. 정 전 총리는 코로나19 백신 접종 현장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의료진에게 “나는 심리적으론 아직도 중대본부장”이라며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고 격려했다.
병원에서 발걸음을 떼며 정 전 총리는 “지난해 2월 25일 대구에 내려왔을 땐 ‘대구가 중국 우한(武漢)처럼 되면 어쩌나’하는 마음뿐이었다”며 “이제 백신 접종이 제대로 안 되면 이제 내가 책임져야 한다. (정치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 정세균에게 방역은.
- “정부는 물론이고 민간·공공 의료계의 헌신이 컸다. 그렇게 K-방역이 이뤄졌으니 그걸 폄훼하는 건 지혜롭지 않은 일이다. 방역 성과와 책임은 내가 죽을 때까지 따라올 일이라고 생각한다.”
- 9월까지 코로나 백신 3500만명 접종이 가능한가.
- “충분히 가능하다. 9900만명분의 백신을 계약했다. 6월부터 병·의원으로 접종처를 늘리면 가파르게 접종률이 올라갈 거다.”
최근 정 전 총리는 이재명 경기지사와 러시아 백신 ‘스푸트니크V’ 도입 문제로 설전을 벌였다. 이 지사가 청와대에 지난 19일 스푸트니크V 도입 검토를 요청하자 정 전 총리는 “청와대에 공박하듯이 제안하는 건 적절치 않다”(지난 22일)고 했다가 “중대본 회의에 잘 나오지 않아서 잘 모르는 거 같다”(지난 26일)며 비판 수위를 높였다.
- 이 지사 발언은.
- “정치적 의도가 있는 거 같다. (방역을 총괄하는) 정부에 얘기하지, 왜 청와대나 언론에 말하나. 야당 출신도 아니고 여당 도지사가.”
- 비판 강도가 세지는 이유는.
- “정치인이 회피하기만 하면 소신 없고 눈치 보는 사람처럼 보인다. 저에겐 ‘파이팅 스피릿’이 있다. 지금도 최소한만 반응하는 거다.”
정 전 총리는 국무총리직 사임(지난 16일) 후 첫 행선지로 영남을 택했다. 지난 25일 경남 밀양을 찾아 부산 민주화 운동 대부이자 문재인 대통령의 멘토인 송기인 신부를 만났다. “총리님의 원만함과 경력이 지금 필요하다”는 송 신부의 말에 정 전 총리는 “선의의 경쟁을 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후 봉하마을을 찾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에 참배한 뒤 권양숙 여사, 김경수 경남지사와 오찬을 함께 했다.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의 뿌리가 친노(親盧)임을 드러낸 것이다.
- 영남권 분위기가 어떤가
- “저는 의성 정씨다. 안동에서 군 생활을 했다. 처가도 포항이어서 영남권에서 가깝게 느껴주시는 거 같다.”
- 호남 출신이란 점에 한계는.
- “하하. 옛날보다는 지역주의가 조금 완화됐다.”
- 이낙연 전 대표와 호남경쟁은.
- “거기에 주력하진 않는다. (호남에서 세를 모으자고) 쟁탈전을 벌이는 건 좋지 않다. 하지만 (전망은) 괜찮을 거다.”
고 김대중 대통령 권유로 정계에 입문해 15대 총선에서 당선된 그는 노무현 정부 때 산업자원부 장관과 열린우리당 의장(대표)을 지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회의장을 거쳐 국무총리로 1년 3개월을 일했다. ‘대통령 빼곤 다 해 본 정치인’이라는 정치적 이력이 오히려 부담일 수 있다. 화려한 이력에 그는 “세 분 대통령께 인정을 받은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정통성이 완벽한 대선 주자란 의미다. “너무 다하려 한다는 지적도 있다”고 묻자 “그런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경청하겠다”고 답했다.
- 문재인 정부의 공과는.
- “문재인 정부는 오랜 숙제였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를 해냈다. 검·경 수사권 조정, 국가정보원 개편 등 권력기관 개혁을 이뤘다. 북핵 문제도 해결은 못 했지만, 관리는 할 수 있게 됐다. 적잖은 성과가 코로나 확산에 가려졌다. 부족함이 왜 없겠나. 하지만 상당한 업적이 있다.”
- 문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 “아주 바르고 좋은 분이다. 저는 불행하지 않은 최초의 대통령이 될 거라 본다. 후임자가 전임자를 부정하는 정치는 이젠 없었으면 한다. 정권 재창출이 최고의 선(善)이다.”
- 이낙연 전 대표는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 필요성을 거론했다.
- “민주당은 그런 것에 기대면 안 된다. 자력으로 정권 재창출할 궁리를 해야 한다.”
정 전 총리는 정치권 입문 전 종합상사인 쌍용그룹에서 17년(1978~1995년)간 일했다. 자신의 이념 성향을 “중도 진보”라고 말해 온 그는 2008년 저서『질 좋은 성장과 희망 한국』에서 “성장과 고용이 선순환 구조를 이루면서 그 성과가 모든 국민에게 골고루 파급되는 성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 대선 어젠다는.
- “성장 없이는 분배가 어렵단 점에서 성장 담론을 꺼내야 하는데 진보진영에선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꺼낸 게 ‘질 좋은 성장’이다. 대·중소기업이 함께 혁신하고 동반 성장한 결과가 고용으로 이어져야 한다.”
- 당·정의 부동산 난맥상이 두드러진다.
- “투 트랙으로 가야 한다. 주거 빈곤층엔 공공임대주택을 저렴하게 공급하고 중산층에는 합리적인 가격에 자가 주택을 가질 수 있게 할 거다. 1가구 1주택자는 보호하는 세제를 만들어야 한다.”
정 전 총리는 민주당 내에 대표적인 분권형 개헌론자다. 그러나 그는 “(개헌은) 꼭 필요하지만 지금은 개헌의 시간은 아닌 거 같다”고 말했다. 본선 진출 시 경쟁자로 유력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한 평가는 냉정했다. “좋은 검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좋은 검사가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한국 수준과는 안 맞을 거 같다.” 정 전 총리는 이날 밤 광주를 향해 떠났다. 28일 5·18 민주묘지 참배를 시작으로 이틀간 광주·전남의 민심을 들을 예정이다.
대구=김효성 기자 kim.hyos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