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은 왜 일본과 달리 성리학 '탈레반'의 나라가 됐나

중앙일보

입력 2021.04.25 15:48

업데이트 2021.04.28 18:40

17세기 일본의 성리학자 야마자키 안사이는 어느날 제자들에게 "만약 중국이 공자를 대장으로, 맹자를 부장으로 삼아 일본을 공격한다면 공맹(孔孟)의 도를 배운 이들은 어떻게 해야겠는가?"라고 물었다. 제자들이 당황하자 그는 "무기를 쥐고 그들과 일전을 벌여 공맹을 사로잡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한다. 이것이 공맹의 도"라고 답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청에게 멸망한 부모의 나라 명나라의 원수를 갚자는 북벌론(北伐論)이 한창 논의되고 있었다. 같은 성리학을 공부했지만 두 나라의 인식은 이렇게 달랐다.

"과거제 없는 일본, 유학의 유용성 추구
경서만 공부하면 인정받는 조선과 달라"
"'실학'은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무관"

17세기 북벌론을 주도했던 노론 송시열 [중앙포토]

17세기 북벌론을 주도했던 노론 송시열 [중앙포토]

17세기는 조선에서 성리학적 질서와 세계관이 더욱 강화된 시기다. 장자 상속, 노비제, 남녀 차별 등 우리가 조선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가 이때 완성됐다.
반면 중국과 일본에서는 다른 움직임이 나타났다. 성리학의 원조였던 중국에서는 신분 질서를 탈피하고 실천을 강조한 양명학이 자리 잡았다. 일본의 변화는 더 극적이다. 임진왜란 후 조선을 통해 성리학을 수입했던 일본이 17세기에는 주자성리학을 비판하는가 하면, 자국을 중국(中國)으로 여기는 시각마저 나타났다. 조선이 자신을 소중화(小中華)라며 자부한 것과는 결이 다르다.

신간 『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는 17세기 조선에서 성리학이 한층 강화·발전되는 양상을 다룬 교양학술서다. 주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조선만 '성리학 월드'로 남아 오히려 그 질서가 강화된 이유는 무엇일까. 대만에서 활동 중인 저자 강지은 국립대만대 국가발전대학원 부교수와 25일 이메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강지은 대만국립대 교수 [사진 강지은 교수]

강지은 대만국립대 교수 [사진 강지은 교수]

-17세기 성리학은 왜 강화됐나. 전쟁에서 무능함을 보여준 양반들이 체제 균열을 우려해 신분 질서를 강화하려고 해서인가?
=전쟁과 관련 있는 것은 맞지만, 신분 체제의 균열을 우려해 의도적으로 강화한 것 같지는 않다. 왜란 시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패전 소식을 접하며 "전쟁으로 인해 윤리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 "조정과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발휘하도록 고무하는 것이 관건이다" 등의 발언을 많이 남겼는데 이런 생각이 전후 국정 운영과 각 사회에 자연스레 반영됐다고 본다. 반면 국방력 강화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기준에서는 한심해 보이지만 당시 명나라 원군이나 의병 활동 등을 감안하면 그들이 틀렸다고만 일갈하기도 어렵다.

-조선에서는 성리학만 파고드는 반면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보고 양명학도 수용했다. 왜 이런 차이가 나왔나
=조선 양반은 태어나면서부터 유학을 공부해야 하는 운명이다. 유학을 공부하면 관직을 얻고 부귀영화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주자가 남긴 책만 철저하게 공부하면 되는 사회였다. 반면 일본은 과거제가 없었다. 심지어 무사의 도(道)와 다르다고 배척당했다. 유학에 관심 있는 무사는 밤에 몰래 경서를 읽었을 정도다. 유학의 필요성이 인정받지 못하다보니 일본의 학자들은 유학과 사회적 이익이 만나는 유용성을 추구했다. 조선과 달리 에도 막부 시절 일본에서는 유학만 무조건 맞다고 할 필요도 없었고,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해석에 수정을 가하면서 '독창적'인 해석도 가능했다. 또 일본에는 성리학과 비슷한 시기에 양명학 등 다른 유학 사상도 한꺼번에 들어왔다. 그래서 서로 비교하며 연구할 수 있었다.

-17세기 윤휴는 '세상의 이치를 주자(주희)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고 했다가 '사문난적'으로 찍혔다. 성리학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나
=17세기 주자에 대한 논쟁을 주자학 교조주의자와 반대파의 대립으로 해석한 연구들이 있는데 맞지 않은 부분이 많다. 이 시대 유학자들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주자가 쓴 문헌도 일치하지 않는 내용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들은 주자의 정설이 무엇인지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주자의 어떤 문헌을 근거로 보면 이렇게 해석해야 맞다”라는 식이다. 윤휴도 주자가 틀렸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주자가 실제로 한 말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는데, 대립 관계였던 송시열이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사진 푸른역사]

『새로 쓰는 17세기 조선 유학사』 [사진 푸른역사]

-18세기 실학은 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움직임 아닐까
=주자는 행위의 결과에 대해 우선하여 관심을 갖는 공리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옳음(義), 이치(理)를 중요시했다. 그런데 오늘날 말하는 조선 후기 실학의 특성 안에 공리주의가 포함되기도 하고, 좋은 것은 다 실학으로 귀결시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실학(實學)’이라는 단어를 분석해 보면,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게 아니라 조선에서 학자들 사이에 장기간 꾸준하게 거론된 용어다.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수기만 하고 치인을 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고민들이다. 다시 말해 실학은 18세기에 성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나온 학문이 아니라 성리학 안에서 꾸준히 진행된 학문이다.

-그러면 조선에서는 독창적 성리학 연구가 없었나
=17세기 일부 '정설'과 다른 목소리를 자꾸 반주자학적인 움직임으로 해석하려고 하는데 일본의 영향이 있다고 본다. 일본 식민당국이 '독창성'을 강조하면서 조선 유학을 깎아내리니까 이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일본은 정밀한 해석보다 독창성을 중요시 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유학사에서 독창성이 키워드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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