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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차례 퇴짜 ”…수탁사 몸사리기에 사모펀드 업계 고사위기

중앙일보

입력

지난해 사모펀드 피해자들이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금융사 징계를 촉구하는 기자회견 하는 장면. 뉴스1.

지난해 사모펀드 피해자들이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금융사 징계를 촉구하는 기자회견 하는 장면. 뉴스1.

#1. 2년 전 대체투자 전문운용사를 설립한 A대표는 요즘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는 올해 초부터 국내 물류센터에 투자해 임대수익을 투자자에게 배당하는 사모펀드를 준비했다. 2500억원 가량의 기관투자자 자금도 끌어왔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펀드 설정이 막힌 건 수탁 계약 단계다. 신생 운용사라는 이유로 수탁사마다 번번이 계약을 거부했다. A대표는 “이러다 올해 펀드 하나도 못 만들고, 회사 문을 닫는 게 아닌지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2. 중견 운용사를 이끄는 B대표는 지난해 말부터 해외 주식에 투자하는 펀드를 구상하다 포기했다. 인도네시아와 태국 등 동남아 증시에 상장된 유망기업에 투자하는 사모펀드였지만 동남아 주식은 투자 위험이 크다는 반응이었다. 10년 넘게 탄탄한 운용성과에도 수탁사를 찾지 못해 결국 계획을 접었다. B대표는 “여러 차례 수탁사를 만나 현지 실사 등으로 리스크를 줄일 방법을 내놨지만 안 통했다”며 “수탁사 문턱이 너무 높아져 갑갑하다”고 했다.

사모펀드 업계가 고사 위기에 처했다. 수조원대의 펀드 환매가 중단된 ‘라임ㆍ옵티머스 사태’로 투자자의 외면이 이어지는 데다, 수탁사의 몸 사리기로 새로운 펀드를 내놓는 길도 막히고 있어서다. '사모펀드 수탁 대란'이다.

새로운 펀드가 세상에 나오려면 운용사와 판매사, 수탁사가 필요하다. 운용사는 펀드를 설계하고 굴리는 곳이다. 판매사는 증권사나 은행 등 펀드를 파는 곳이다. 수탁사는 펀드에 들어온 자산을 보관하고 운용사의 지시에 따라 주식이나 채권을 사고파는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은행이 수탁사를 맡는다. 은행 등 수탁사 없이 운용사가 펀드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쥐꼬리 수익에 책임만 커져…한달에 10건 계약

하지만 라임·옵티머스 사태 이후 은행권이 수탁업무를 꺼리면서 펀드 설정이 어려워지고 있다. 은행 등이 사모펀드 수탁 계약을 외면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수익(수탁 수수료)은 적은 데 책임은 배로 커졌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라임ㆍ옵티머스 사태 이후 지난해 7월부터 수탁 기관도 사모펀드를 감시ㆍ감독하도록 했다. 옵티머스 펀드처럼 운용사가 투자 계획과 달리 실체가 불분명한 비상장기업에 투자하는지 꼼꼼하게 점검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운용사에 시정을 요구하는 것도 수탁사 몫이다. 수탁사의 감시 책임을 한층 강화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지난달 국회를 통과해 오는 10월부터 시행된다. 옵티머스 사태와 관련해 수탁사 공동책임론을 주장하는 다자배상안 등이 나오는 것도 수탁사 입장에서는 부담스럽다.

주요 은행의 사모펀드 수탁 계약 건수 변화.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주요 은행의 사모펀드 수탁 계약 건수 변화.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책임은 무거워졌지만 수탁사가 챙기는 수탁 수수료는 0.02~0.04%에 불과하다. 1000억원 규모의 사모펀드 수탁을 맡더라도 손에 쥐는 수익은 최대 4000만원 수준이다. 은행업계 관계자는 “쥐꼬리만 한 수익보다 책임이 과중하다”며 “결국 수탁 위험을 낮출 체크 목록을 만들어서 부동산, 사모사채 등 비시장성 자산이 많거나 설정액 작은 사모펀드는 제외하고 있다”고 했다.

수탁사의 몸 사리기는 ‘개점휴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이영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은행권 펀드 수탁계약 현황’에 따르면 국내 은행(신한ㆍ하나ㆍ우리ㆍ농협ㆍ부산ㆍ산업ㆍSC제일ㆍ씨티은행) 8곳의 사모펀드 수탁계약은 지난해 2168건으로 전년(4567건)보다 52% 줄었다.

하나은행의 경우 지난해 상반기 월평균 70건이던 수탁 계약은 지난해 9월부터 10건 초반으로 뚝 떨어졌다. 2019년의 월평균 수탁 계약은 120건을 넘었다. 우리은행 역시 지난해 월평균 계약 건수(25건)가 1년 전(40건)보다 40% 가까이 줄었다.

작년 신규 사모펀드 설정액, 1년전 반 토막  

그 결과 지난해 신규 펀드 설정액이 거의 반 토막 나는 등 사모펀드 업계의 위축은 진행형이다. 20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사모펀드 신규 설정액은 63조820억원으로 1년 전(110조6238억원)보다 43% 감소했다. 2016년 이후 매년 6000개 이상 나오던 새 상품(사모펀드)도 지난해(2592개) 처음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사모펀드 수탁 대란은 최근의 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이달 초 금융투자협회가 250여개 운용사 대상으로 진행한 ‘펀드 수탁 거부 관련 사례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20%(51곳)가 “사모펀드 신규 설정에 있어 한 번 이상 수탁 계약이 거부됐다”고 답했다. 이 중 한 곳은 “지난해 6월 이후 총 40차례 수탁 계약이 무산돼 사모펀드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사모펀드 신규 설정 건수, 1년 새 ‘반토막’.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사모펀드 신규 설정 건수, 1년 새 ‘반토막’.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100억 미만의 소규모 펀드나 부동산, 메자닌(주식과 채권의 성격을 지난 상품) 등 비시장성 투자 비중이 높으면 리스크 점검이 어렵다는 이유로 수탁 계약이 안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펀드 설정이 어려워지면서 소규모 기금을 굴리는 곳이나 공제회 등도 투자처를 찾지 못해 아우성이다. 금융투자 업계 관계자는 "펀드 설정이 어려워진 탓에 국내에서 투자처를 찾지 못하게 되며 해외 운용사가 진공청소기처럼 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 수탁사를 찾을 수도 있지만 비용이 큰 탓에 쉬운 선택은 아니다.

해외에선 민간 설립 수탁사도 있어

수탁 대란이 지속하자 금융당국도 해결책을 찾고 있다. 지난 2월부터 ‘수탁업무 태스크포스(TF)팀’을 운영 중이다. 수탁업무에 대한 모범규준을 만들기 위해서다. 금감원 관계자는 “모범규준이 나오면 수탁업무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돼 혼란은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시각이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사모펀드 수수료 체계 개편처럼 수탁사의 규제 비용을 고려한 유인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당장 사모펀드 업계가 숨통을 틔울 수 있게 한국증권금융 등 공공 기능이 있는 기관이 수탁 업무 규모를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예 자산운용사가 지분을 출자해 민간 차원의 전문수탁사를 만들고, 당국이 이를 허가해줄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실제 해외에선 민간이 설립한 수탁사가 있다. 바로 헤지펀드 전문 수탁사인 시트코다. 약 1조1000억 달러(1230조원) 자금을 관리하며 전 세계 50여개 지점을 갖고 있다.

이영 의원은 “불완전판매 등 위법행위에 대해서는 엄단해야 하지만 이것이 수탁 기피나 시장 붕괴로 이어지는 점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침체의 늪에 빠진 사모펀드 시장이 순기능을 회복될 수 있도록 금융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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