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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도 8개중 2개만 받았는데…끝내 ILO 핵심협약 강행한 정부

중앙일보

입력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3개 비준서를 20일 ILO에 기탁했다. 이로써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핵심협약 비준 절차를 마무리했다. 이번 협약 비준으로 근로자 권리가 기존보다 확대 강화되는 등 긍정적 효과가 기대된다.

하지만 일부 조항은 국내법과 충돌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국제 협약이어서 분단국가의 특성이 고려되지 않고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탓에 국내기업들이 국제분쟁 등에 휘말릴 수도 있다. 자칫하면 정부의 무관심 속에 기업이 경쟁 중인 다른 글로벌 기업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을 소지가 있어서다.

ILO 핵심협약 8개 중 7개 비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3개가 20일 기탁식을 가지고 비준절차를 완료했다. 노동계는 그동안 ILO 핵협약 비준을 촉구해 왔다. 연합뉴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3개가 20일 기탁식을 가지고 비준절차를 완료했다. 노동계는 그동안 ILO 핵협약 비준을 촉구해 왔다. 연합뉴스

20일 고용노동부는 ILO와 화상으로 '핵심협약 비준서 기탁식'을 진행했다. 이날 기탁식에는 이재갑 고용부 장관과 가이 라이더 ILO 사무총장이 참석했다. 이번에 비준을 완료한 ILO 협약은 1년 후인 내년 4월부터 발효된다. ILO는 1919년 설립 이후 190개 협약을 채택했다. 그중 기본 노동권과 관련한 8개 협약을 핵심협약(Fundamental Conventions)이라고 한다.

그동안 한국은 8개 핵심협약 중 4개를 비준하지 않았다. 노조 활동을 폭넓게 인정하고, 강제 의무 노동을 엄격히 제한하는 협정 내용이 국내법과 충돌한다는 이유였다. 경영계는 물론 노동계도 ILO 가입 당시 "시기상조"라며 비준에 반대했었다. 미국도 2개만 비준하고 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ILO 협약 비준을 대선공약으로 추진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정부도 최근 실업자와 해고자 노조 가입을 일부 허용하는 내용의 노조법을 개정해 협약 비준 위한 정지 작업 끝냈다.

이번에 절차를 완료한 핵심협약은 ▶강제 또는 의무 노동에 관한 협약(29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 원칙의 적용에 관한 협약(98호) 3개다.

고용부는 “핵심협약 비준으로 국제사회와의 약속 이행을 통해 국격 및 국가 신인도 제고에 기여하게 됐다”며 “노동 조항이 담긴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등과의 분쟁 소지를 줄여 통상 리스크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자평했다. 정부의 평가대로라면 2개밖에 비준하지 않은 미국은 국격과 국가 신인도가 형편없다는 말이 된다.

“대체복무, 국내 기업에 무역 폭탄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정부의 자화자찬과 달리 국내기업들은 ILO 협약이 국제 무역 분쟁에 휘말릴 단초를 제공했다고 우려한다. 정부가 ILO 협약 비준을 위해 국내법 일부를 개정했지만, 협약과 충돌하는 부분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여서다.

대표적인 것이 군 대체복무다. 이번에 비준서를 기탁한 ILO 협약 29호(강제 또는 의무 노동에 관한 협약)는 순수한 군 복무와 양심적 병역거부에 따른 대체복무까지만 강제노동 예외로 본다. 협약 29호의 제2조는 전적으로 군사적 성격의 노동 또는 서비스를 제외하곤 협약 위반이 된다. 따라서 각 기업에서 일하는 전문연구요원, 산업기능요원과 같은 대체복무요원은 협약 위반이 된다. ILO는 이런 행위를 군 복무라는 명분으로 노동력을 값싸게 활용하는 행위, 일종의 불공정 무역행위로 보고 금지한다.

실제 ILO는 이집트와 터키가 초과 징집병을 공기업이나 사기업에 배치한 사례를 29호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또 ILO는 2007년 8월 한국 공익근무에 대해 “협약 적용 제외 대상이 아니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이런 ILO의 입장은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기업, 관세폭탄·수입금지 등 무역제재 대비해야 

정부는 “대체복무를 선택할 수 있게 선택권을 부여하면 협약 요건을 충족할 수 있다”며 협약과 충돌 가능성을 부인했다. 하지만 이는 정부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예컨대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을 비롯한 국내 글로벌 기업 연구소에는 전문연구요원이라는 이름으로 병역을 대체하는 인재들이 근무한다. 국내 대기업 상무로 재직 중인 A씨도 유학 뒤 외국기업에서 일하려다 대체복무 제안을 받고 국내 기업 연구원으로 첫발을 뗐다. 이들에 대해 글로벌 경쟁업체가 협약 위반으로 국제기구에 제소하면 꼼짝없이 기업이 코너에 몰리게 된다. 강제협약 위반 소지가 있어서다.

익명을 요구한 경영학 교수는 "정부의 주장과 달리 경쟁업체가 제소해서 협약 위반으로 판정되면 관세폭탄과 수입금지 같은 무역 제재를 감수해야 한다. 기업의 사활과 관계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경총은 이날 손경식 회장 명의로 가이 라이더 ILO 사무총장에게 협약 비준에 따른 우려를 서한으로 전달했다. 하지만 ILO가 협약 비준을 환영하는 상황에서 이런 서한은 사실상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따라서 비준을 밀어붙인 정부와 이를 묵인하는 경제단체가 분쟁에 휘말린 기업을 지원해 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협약 위반과 관련된 분쟁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개별 기업이 온전히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정부도 이날 보도자료에서 "회원국 등의 이의제기와 이에 따른 절차가 진행될 수 있다"고 썼다. 책임은 기업에 있고, 정부는 책임질 수 없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국내 실정을 외면한 면피성 멘트"라는 얘기가 나온다.

ILO 협약을 비준하려 서둘러 개정한 노조법도 ILO 협약과 충돌 우려가 있다. 이번에 비준한 87호 협약(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르면 해고자와 실업자도 노조 간부로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개정한 노조법은 산업별 노조가 아닌 기업별 노조에서는 해고자와 실업자의 노조 임원 선출을 여전히 금지한다. 자율적 노사관계가 외부 힘이나 압력에 의해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다만 고용부는 “기업 종사자가 아닌 사람을 노조 간부로 앉히고 싶다면, 기업별 노조가 아니라 산별 노조를 선택하면 되도록 이미 선택권을 부여해 놨기 때문에 협정 위반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노사관계 불균형…경영계 대항권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마련해야” 

현행법 체계에서도 협약 시행이 문제없다는 정부 설명과 달리, 전문가들은 국내법과 협약이 충돌하는지는 “법적 분쟁을 통해 다퉈봐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국내법이 협약에 일치하는지에 대한 유권해석 권한이 정부에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해명은 그저 '주장'일 뿐 판단은 ILO가 하기 때문이다.

경영계는 ILO 협약을 근거로 노사관계의 힘의 추가 노동자 쪽으로 급격히 기울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미 양대 노총은 ILO 비준을 근거로 노조법 재개정을 요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실제 민주노총 법률원은 15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가 노조법상 근로자 포함할 수 있게 범위를 확대하고 노조 임원·대의원에 해고자, 이직자, 실업자 등이 선출할 수 있도록 노조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만약 ILO가 우리 국내법이 협약과 충돌한다고 판단하면 그 부분에 대해서도 국내에서 사법적인 판단을 다시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용춘 한국경제연구원 고용정책팀장은 “결국 ILO 협정을 빌미로 노동계는 노조 단결권 등 권리 강화를 계속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면서 “노사관계 균형화·합리화를 위해서는 사용자의 대항권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도록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종=김남준 기자 kim.nam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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