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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걸을때 제일 예쁜 길" 제주 올레 10코스의 재발견 [다자우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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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우길.
코로나 시대, 사람들이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닫힌 공간에서 나와 온몸으로 열린 세계와 만나고 있습니다. 확 트인 자연만큼 안전한 곳도 없고, 두 발로 뚜벅뚜벅 걷는 여행만큼 안전한 레저 활동도 없습니다. 중앙일보가 매달 전국의 걷기여행길 중에서 추천 코스를 골라 하나씩 걷습니다. 다자우길. ‘다시 걷자, 우리 이 길’의 준말이자, 코로나바이러스를 이겨내자는 다짐의 구호입니다.

다자우길① 제주올레 10코스

제주올레 10코스 알뜨르. 제주도 최대 마늘 산지인 이 드넓은 들판이 일제 강점기 전투기 비행장으로 쓰였다. 마늘밭 중간중간 전투기 격납고가 보인다.

제주올레 10코스 알뜨르. 제주도 최대 마늘 산지인 이 드넓은 들판이 일제 강점기 전투기 비행장으로 쓰였다. 마늘밭 중간중간 전투기 격납고가 보인다.

다시 올레길을 걸었다. 10년 전에도 올레길부터 걸었다. 그 시절 전국에 불었던 걷기여행 바람이 올레길에서 시작되어서였다. 다시 걷기로 작정한 지금, 올레길로 돌아가 걸음을 시작하는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제주올레 서명숙(64) 이사장이 10코스를 걷자고 했다. 동행은 고마운데, 10코스를 고른 건 의외였다. 제주올레 26개 코스 중에서 10코스는 7코스와 함께 가장 대중적인 코스다. ㈔제주올레가 완주자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10코스는 7코스 다음으로 인기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너무 뻔하지 않나 싶었는데, 서명숙 이사장에겐 다 계획이 있었다.

거꾸로 걷기

제주올레 10코스를 거꾸로 걸었다. 하모해수욕장에서 대정평야 마늘밭으로 들어왔다. 유채꽃 만발한 들녘에서 봄을 만끽했다.

제주올레 10코스를 거꾸로 걸었다. 하모해수욕장에서 대정평야 마늘밭으로 들어왔다. 유채꽃 만발한 들녘에서 봄을 만끽했다.

“‘역올레’하자. 거꾸로 걷자고. 종점에서 시작해 시작점으로 돌아오자고. 10코스는 역방향으로 걸을 때 제일 예쁜 길이야.”

역올레. 제주올레가 5년 전부터 걷기축제 때 쓰는 방식이다. 제주올레는 시계 방향으로 코스가 이어진다. 1코스 시흥초등학교에서 시작해 해안을 따라 제주도를 한 바퀴 돈 뒤 21코스 종달 포구에서 끝난다. 제주올레 걷기축제가 시계 방향으로 제주도를 한 바퀴 다 돌자, 2016년부터는 코스마다 시작점과 종점을 바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제주도를 다시 돌고 있다.

역올레는 기대 이상으로 반응이 좋았다. 이미 걸은 길도 거꾸로 걸으니 처음 걷는 것 같았다는 올레꾼이 많았다. 같은 길도 걸을 때마다 다르게 마련이다. 하물며 거꾸로 걸으니 전혀 느낌이 다를 수밖에. 솔직히 제주올레여서 가능한 시도였다. 길목마다 이정표가 잘 돼 있고, 길 정보가 체계를 갖춰 거꾸로 걸어도 길 잃을 염려가 없었다. 역올레 덕분에 제주올레는 아무 일도 안 하고 코스를 두 배 거느리게 되었다.

제주올레 10코스 지도. 원래는 화순금모래해변에서 시작해 하모체육공원에서 끝나지만, 거꾸로 걸으면 시작점과 종점이 바뀐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정표가 잘 돼 있다. 지도 제주올레 홈페이지

제주올레 10코스 지도. 원래는 화순금모래해변에서 시작해 하모체육공원에서 끝나지만, 거꾸로 걸으면 시작점과 종점이 바뀐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정표가 잘 돼 있다. 지도 제주올레 홈페이지

10코스를 거꾸로 걸으려면 제주도 서남쪽 모서리 모슬포로 가야 했다. 마침 날이 좋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모슬포 하늘은 바다처럼 파랬다. 모슬포는 ‘못살포’라고 불릴 만큼 바람이 드센 고장이다. 고맙게도 이날은 바람도 잠잠했다. 서명숙 이사장이 “걷기여행 시작했다고 설문 할망이 도와주나 보다”고 웃으며 말했다. 제주도에선 날이 좋아도 설문 할망을 찾고, 날이 나빠도 설문 할망을 찾는다.

제주올레 10코스를 함께 걸은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둘이서 온종일 수다 떨며 걸었다.

제주올레 10코스를 함께 걸은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둘이서 온종일 수다 떨며 걸었다.

모슬포 읍내에서 빠져나온 길은 하모해수욕장으로 이어졌다. 옛날 ‘멜(멸치)’이 많이 올라와 ‘멜케’라 불리던 해변이다. 해안과 나란하던 길이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정평야 안으로 들어갔다. 푸른 들녘이 장쾌하게 펼쳐졌다. 대정평야는 제주도 최대 마늘 산지다. 지금은 농부들이 무 수확에 한창이었다. 역방향으로 걸으니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 하나하나가 새로웠다.

다크 투어리즘 

알뜨르. 산방산 앞으로 낮은 언덕들이 보인다. 이 언덕들이 일본군 전투기 격납고다.

알뜨르. 산방산 앞으로 낮은 언덕들이 보인다. 이 언덕들이 일본군 전투기 격납고다.

알뜨르에 들어섰다. 알뜨르는 ‘아래에 있는 넓은 들’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넓게 보면 대정평야에 속하는 들판이나 알뜨르라는 낱말에는 훨씬 더 많은 울림이 담겨 있다. 알뜨르는 국내 다크 투어리즘의 성지와 같은 장소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 어두운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여행을 이른다.

알뜨르 보리밭. 보리밭 안에도 일본군 전투기 격납고가 있다.

알뜨르 보리밭. 보리밭 안에도 일본군 전투기 격납고가 있다.

알뜨르는 일제 강점기 전투기 비행장이었다. 일본군의 전투기 격납고 19기가 여전히 마늘밭 곳곳에 흉물처럼 남아 있다. 이 알뜨르에서 출격한 비행기가 가미카제(神風) 훈련기다. 실제로 일본군 전투기 600기가 이 들판에서 날아올라 중국 난징(南京)을 폭격했다.

알뜨르 비행장 어귀 주차장에 설치된 최평곤 작가의 조형물 ‘파랑새’. 대나무를 이용해 소녀가 파랑새를 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높이가 무려 9m에 이른다.

알뜨르 비행장 어귀 주차장에 설치된 최평곤 작가의 조형물 ‘파랑새’. 대나무를 이용해 소녀가 파랑새를 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높이가 무려 9m에 이른다.

알뜨르에서 섯알오름 가는 길목에 검은 비석이 서 있다.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 추모비 뒤로 돌아가니 웅덩이 두 개가 보인다. 제주 4·3의 학살 현장이다. 1950년 8월 20일 계엄군이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연행한 양민 210명을 이 자리에서 총살했다. 계엄군은 숨진 양민을 웅덩이에 던진 뒤 접근을 막았다.

웅덩이가 개방된 건 그로부터 7년 뒤였다.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려 했으나 할 수 없었다. 살은 썩었고 뼈는 엉켜 있었다. 고민 끝에 유족은 칠성판 위에 두개골 하나와 등뼈 하나씩 놓고 유골을 얼추 한 벌씩 맞췄다. 그리하여 모두 132기의 무덤을 만들어졌다. 그 공동묘지가 백조일손묘(百祖一孫墓)다. 조상은 백 명이나 자손은 하나인 무덤. 조상을 알 수 없어 모든 조상의 자손이 되어 모신다는 뜻이다.

제주올레 10코스 섯알오름 초원. 역올레 걷기를 하면 얻을 수 있는 선물 같은 풍경이다. 왼쪽으로 산방산이, 오른쪽으로 형제섬이 보이고, 가운데 박수기정 뒤로 한라산도 보인다.

제주올레 10코스 섯알오름 초원. 역올레 걷기를 하면 얻을 수 있는 선물 같은 풍경이다. 왼쪽으로 산방산이, 오른쪽으로 형제섬이 보이고, 가운데 박수기정 뒤로 한라산도 보인다.

가슴 시린 현장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섯알오름 정상에 오르니 갑자기 시야가 트였다. 정면으로 산방산이 보이고 멀리 서귀포 앞바다가 펼쳐졌다. 정방향으로 걸었으면 돌아보지 않는 이상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서명숙 이사장이 “선물 같은 풍경”이라며 “바로 이 전망 때문에 10코스는 역방향으로 걸을 때 가장 아름다운 코스”라고 말했다. 둘이서 오름 풀밭에 누워 한참 바다를 바라봤다.

길이 백신이다 

제주올레 10코스 송악산. 송악산의 옛 이름이 절울이오름이다. 파도가 부딪혀 우는 오름이란 뜻이다. 멀리 길게 누운 오름이 바굼지오름이다.

제주올레 10코스 송악산. 송악산의 옛 이름이 절울이오름이다. 파도가 부딪혀 우는 오름이란 뜻이다. 멀리 길게 누운 오름이 바굼지오름이다.

섯알오름에서 나온 길은 다시 오름으로 들어갔다. 송악산(松岳山). 익숙한 이름이지만, 어울리는 이름은 아니다. 이름처럼 소나무가 많지 않다. 원래 이름은 따로 있었다. 절울이오름. ‘절’이 물결을 가리키므로, 물결 우는 오름이라는 뜻이다. 파도가 송악산 해안절벽과 부딪혀 울리는 소리에서 이름이 나왔다.

송악산에서 내다본 서귀포 앞바다. 왼쪽에 산방산이 보이고 오른쪽에 형제섬이 보인다. 한라산이 또렷하다.

송악산에서 내다본 서귀포 앞바다. 왼쪽에 산방산이 보이고 오른쪽에 형제섬이 보인다. 한라산이 또렷하다.

송악산 해안절벽에 일본군이 판 진지동굴 15개가 있다. 옛날에는 이 동굴에 들어가 기념사진도 찍었는데 지금은 입구가 막혔다. 제주도 사람은 송악산 해안동굴을 ‘일오동굴’이라 한다. 동굴이 15개여서 일오(15)다. 송악산 능선과 해안에서 발견된 일본군 진지동굴만 60개가 넘는다. 송악산은 가장 많은 일제 군사시설이 발견된 현장이다.

제주올레 10코스 사계 해변. 왼쪽으로 산방산이, 오른쪽으로 용머리해안이 보인다. 10코스를 정방향으로 걸으면 이 풍경을 만끽할 수 없다.

제주올레 10코스 사계 해변. 왼쪽으로 산방산이, 오른쪽으로 용머리해안이 보인다. 10코스를 정방향으로 걸으면 이 풍경을 만끽할 수 없다.

송악산을 돌아 나와 사계 해변을 따라 걸었다. 반대편에서 정방향으로 걸어오는 올레꾼이 눈에 띄었다. 우리처럼 둘이 걷는 올레꾼이 제일 많았고, 혼자 걷는 올레꾼도 제법 보였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무리는 없었다.

“코로나 이후 올레꾼이 확 늘었어. 단체는 사라졌고, 개별 올레꾼만 늘었어. 두어 명이 여러 날씩 길게 걸어. 저마다 흩어져 저마다의 길을 걸어. 모처럼 자유롭게 마음껏 숨 쉬면서.”

제주올레 10코스 하멜 기념관. 하멜 기념관 뒤로 우뚝 선 산방산이 보인다.

제주올레 10코스 하멜 기념관. 하멜 기념관 뒤로 우뚝 선 산방산이 보인다.

서명숙 이사장 말마따나 제주올레는 코로나 사태 이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난해 제주올레 26개 코스(총 길이 425㎞)를 모두 완주한 올레꾼은 2778명이었다. 2019년 1624명보다 71%나 증가했다. 무엇보다 20∼30대 청년층 완주자가 급증했다. 지난해 청년층 완주자는 539명으로 2019년(268명)보다 두 배 넘게 늘었다. 한국관광공사 조사에서는 제주올레를 비롯한 트레일이 코로나 시대 선호하는 최고 야외 관광지로 뽑히기도 했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 못 나갔다는 청년들이 올레길을 걷고서 이렇게 말해. 코로나 때문에 우울했는데, 코로나 덕분에 올레길을 걷게 됐다고. ‘때문’에서 ‘덕분’으로 바뀌었어. 이 만큼 면역력이 생긴 거야. 길은 백신이야. 공간적 백신.”

제주도 글·사진=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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