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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누가누가 더 달라지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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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호 31면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번 보궐선거엔 강력한 신스틸러가 있었다. 주인공인 승자조차 그만한 아우라는 없었다. 압도적 표차였어도 그랬다. 어차피 야당이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선거였다. 그 막대기를 여당이 꺾었더라면 차라리 주연상을 탈 터였다.

선거 패배에도 여권 안 바뀔 것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하는 탓 #승리한 야당도 변화 어려울 것 #더 바뀌는 쪽이 내년 대선 승자

신스틸러는 선관위였다. 잠깐씩 등장했어도 그때마다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었다. 선거 현수막에 ‘내로남불’ ‘무능’ ‘위선’이라는 단어 사용을 금했다. 누구나 특정 정당을 떠올릴 수 있는 단어란 이유였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게 더불어민주당이라는 걸 다 안다는 거였다.

여기서 사실상 선거는 끝났다. 현 정권이 무능하고 위선적인 내로남불 정권이란 걸 선관위가 공식 확인했는데 또 뭐가 필요하겠나. 유권자 눈에 야당이 성에 차지 않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프랑스 철학자 레몽 아롱이 설파했듯, “선택은 늘 혐오스러운 것과 좀 더 나은 것 사이에서 이뤄지는” 까닭이었다. 선택이란 결코 “선과 악 사이의 투쟁이 아닌 것”이다.

집권 여당은 그 혐오를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극복할 생각도 없었다. 기껏 생각해낸 구호가 이랬다. “투기 못 막았다고 투기꾼 찍고, 도둑 못 잡았다고 도둑놈을 뽑을 수 없다.” 유권자 눈엔 자기들도 투기꾼이요 도둑놈일 뿐인데, 결국 자기들을 찍지 말라고 한 거였다. 그걸 또 좋다고 빅마우스들이 퍼 나르기 바빴다.

현 정권이 내년 대선 때까지도 결코 달라지지 않을 거라 믿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아직도 뭘 잘못했는지 모르니 달라지려야 달라질 수가 없다. 선거 막판 열세를 뒤집어보겠다고 “국민에게 송구하다” 머리를 조아렸지만 뭘 어떻게 잘못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한 게 없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패배를 언론 탓 검찰 탓으로 돌리는 태도가 이미 예견돼 있었다.

선데이 칼럼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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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부의 실세라는 한 인물은 선거운동이 한창일 때 “박원순이 뭘 그리 나쁜가”라고 난데없이 외쳐 자기편 선수조차 경악케 했다. 놀라게 한 사람이나 놀란 사람이나 그게 본심이었을 터다.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윤리란 한 공동체가 가진 편견의 종합”이라고 말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기준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윤리의 상대성을 일컬은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그조차 머쓱할 정도로 이들의 윤리는 너무도 편리하게 상대적이다. 윤리적 판단의 기준은 내 편이냐 네 편이냐에 달렸다. 같은 시대 같은 상황에서도 내 편은 옳고 네 편은 그르다.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난 사안을 틈날 때마다 재조사 운운하는 게 그래서다. 그러다 공연히 뇌물 수수 사실만 다시 한번 상기시킬 뿐이지만 기운이 날 때마다 또다시 고개를 쳐들 것이다. ‘피의 사실 공표’가 검찰의 나쁜 버릇임은 분명한데, 정권에 불리한 수사 때만 문제를 삼는 것 또한 그래서다. 이른바 적폐 수사 때는 오히려 방조, 조장하던 걸 누구나 느꼈는데 말이다.

공수처장이 우리 편 피의자의 면담 요청에 자신의 관용차량으로 황제처럼 모시는 것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검찰 개혁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무리수를 써가며 통과시키더니, 일도 하기 전에 처장이 수사대상이 되고 조직은 ‘정권 비리 수호처’라는 오명을 썼다. 우리의 신스틸러 선관위가 선거 당일까지 공정성 논란을 일으키다 줄소송을 우려해 직원배상책임 보험에 가입한다는 웃지 못할 얘기까지 들린다.

이런 사람들이 선거에 졌다고 하루아침에 달라질 리는 만무하다. 지도부가 사퇴하고 비대위를 구성하면 무엇하랴. 진정으로 달라지려면 지난 4년의 존재 가치를 모조리 부정해야 하는데 어찌 가능하겠나 말이다.

더 분명한 것은 달라지지 않을 게 이들뿐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국민의힘 역시 크게 바뀌지 않을 거라는 데 나는 건다. 내 실력보다 상대 실수로 승리하는 게 대부분 우리네 선거 공식이며(이번에는 더욱), 승자들이 결과에 취해 간이 배 밖으로 나오는 것도 늘 봐오던 데자뷔였다. 대한민국 양대 도시 서울과 부산의 모든 구에서 압승한 것은 그동안의 설움을 자만으로 바꿔놓을 가능성을 키운다.

이들에게 자축보다 급한 건 강력한 당 밖 대선 후보들과 순조로운 통합을 이뤄내는 것이다. 그러려면 그 볼품없는 기득권을 내려놓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랬다면 개표상황실의 당선자 옆자리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고 선거를 도운 인물이 앉아야 했다. 시정(市政)을 공동으로 한다는 말까지 않았나 말이다. 초선의원들도 개혁 성명을 발표했지만 울림이 없다. 개혁은 입으로 하는 게 아니다. 말보다는 당의 변화와 쇄신에 밀알이 되려는 의지를 행동으로 먼저 보였어야 했다.

극단적인 무신론자들도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면 세상 모든 신에 기도하는 법이다. 우리네 정치권이 그렇다고 뭐라 할 건 없지만, 한 번쯤은 자기보다는 남을 위해, 나라와 국민을 위해 기도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야 진정으로 달라질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그것이 궁극적인 승리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알아들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게 조금이라도 더 달라진 쪽이 내년 대선의 승자가 되리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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