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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노란 수선화 물결, 여기가 어디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충남 서산에 자리한 유기방가옥은 지금 노랑 천국이다. 유기방씨가 23년 전부터 고택 주변에 심기 시작한 수선화가 어느새 야산 2만 평을 뒤덮었다. 100년 고택과 수선화가 어우러진 모습이 이채롭다.

충남 서산에 자리한 유기방가옥은 지금 노랑 천국이다. 유기방씨가 23년 전부터 고택 주변에 심기 시작한 수선화가 어느새 야산 2만 평을 뒤덮었다. 100년 고택과 수선화가 어우러진 모습이 이채롭다.

유기방가옥. 낯선 이름의 시골집이 올봄 SNS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유기방가옥은 충남 서산에 자리한 백 년 묵은 고택이다. ‘충남 30경(景)’은커녕 ‘서산 9경’에도 들지 않은 곳인데, 전국에서 몰려온 상춘객으로 북새통이다. 이유는 하나. 고택이 들어앉은 산자락을 노랗게 물들인 수선화 덕분이다. 천상의 화원 같은 풍경으로 명성을 얻긴 했지만, 이 집의 자세한 내막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2021년 봄 SNS를 도배한 사진 이면의 사연이 궁금했다.

SNS 도배한 서산 유기방가옥 #산자락에 들어앉은 백년고택 #23년 가꾼 2만평 꽃밭 화제 #마스크 뚫고 농밀한 꽃향기가…

음침했던 대나무숲이 꽃밭으로

유기방씨는수선화밭을 혼자 보기 아까워 고택을 개방했다. 지난해 봄부터 입장객이 급격히 늘어 시름이 깊어졌다. 임시방편으로 논을 주차장으로 쓰고 있지만 턱없이 공간이 부족한 상황이다.

유기방씨는수선화밭을 혼자 보기 아까워 고택을 개방했다. 지난해 봄부터 입장객이 급격히 늘어 시름이 깊어졌다. 임시방편으로 논을 주차장으로 쓰고 있지만 턱없이 공간이 부족한 상황이다.

유기방가옥은 유기방(73)씨가 사는 집이다. 1919년에 지은 가옥으로, 2005년 충남 민속문화재로 지정됐다. 전국적 관심을 끈 건 비교적 최근 일이다. 물론 수선화 때문이다. 인근 가좌리에서 벼농사 짓던 유씨는 약 23년 전 종갓집인 이곳서 살기 시작했다. 장자가 아니었지만, 집안 어른의 신망을 얻어 종갓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어른의 믿음처럼 그는 종갓집을 아끼며 여태 고향을 지키고 있다. 23년 전 집에 들어올 때 마당에 피어 있던 수선화 몇 송이가 유씨의 눈에 들어왔다.

“뒷산에 유독 대나무가 많았는데 골칫거리였어요. 뿌리가 담을 헐기도 하고, 소나무를 고사시키기도 했죠. 대나무의 음침한 기운도 영 싫더라고요. 그래서 닥치는 대로 베고 그 자리에 수선화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만 지은 그가 조경과 원예를 알 리 없었다. 농사하듯 1년 내내 수선화를 돌보고 증식하는 데 골몰했다. 어느새 수선화밭이 고택 주변을 환하게 밝히더니 야산 전체로 번졌다. 약 8만2000㎡(2만5000평) 부지 중에 6만6000㎡(2만평)가 꽃으로 덮였다.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드라마 ‘직장의 신(2013)’과 ‘미스터 션샤인(2018)’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서산뿐 아니라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2018년 봄부터 고택 보존과 수선화 관리를 위해 입장료(5000원)를 받기 시작한 이유다.

제주서 옮겨 심은 비자나무

수선화

수선화

유기방가옥은 수선화 철에만 입장객을 받는다. 올봄은 개화가 빨라 3월 12일 개방했다. 이달 말까지 문을 열어둘 참이다. 수선화가 만개한 요즘은 평일에도 주차장이 북새통이다. 주말에는 방문객이 수만 명에 달하고, 약 4㎞ 떨어진 서산IC부터 길이 막힌다. 지난 1일, 인파를 헤치고 고택을 구경했다. 유씨 말마따나 청와대나 강릉 선교장이 부럽지 않은 명당이었다. 고택 곁에는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보호수도 있었다. 317년 전 제주도에서 옮겨다 심은 비자나무, 수령 400년에 달하는 감나무가 묘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러나 역시 주인공은 수선화였다. 농밀한 꽃향기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왔다. 꽃 모양 때문인지 수천만 개 별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수선화 그림을 그리던 오영숙(59)씨는 “한국에서 이렇게 멋진 꽃 군락지는 보지 못했다”며 감격했다.

많은 사람이 수선화 풍경을 즐기니 마냥 좋을 것 같지만 유씨는 요즘 시름이 깊다. 갑작스레 늘어난 인파를 감당하기 버거워서다. 주차장은 비좁고 화장실도 부족하다. 사람들이 사진 찍느라 꽃을 짓밟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쓰리다. 그런데도 유씨는 수선화 얘기를 할 때만큼은 표정이 해맑았다.

“자식처럼, 황금처럼 수선화를 아꼈더니 이제는 내가 저들에게 위로를 받아요.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하고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아요.”

서산=글·사진 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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