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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후남의 영화몽상

그 섬에 가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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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후남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후남 문화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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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정현종의 시 ‘섬’ 전문)

이준익 감독의 새 영화 ‘자산어보’를 보고 이 시가 떠오른 건 어쩌면 당연했다. 영화의 주요 배경은 19세기 초 흑산도. 평소 쉽게 맛보기도, 눈으로 직접 보기도 힘든 먹거리가 스크린에 여럿 등장한다. 삭히지 않고 생으로 먹는 홍어, 갓 잡아 삶아 국물까지 진국일 듯싶은 문어, 어른 몸집만 한 거대한 돗돔…. 동생 다산 정약용과 함께 당대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친 자산 정약전(1758~1816)이 유배지에서 쓴 책이자, 조선시대 흑산도판 어류백과라고 할만한 『자산어보』에서 제목을 따온 영화답다.

이런 먹거리는 이 섬으로 유배된 정약전(설경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섬사람들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데도 요긴하게 쓰인다. 예컨대 문어는 정약전이 바다에 빠져 앓아눕자, 기력을 회복하라며 가거댁(이정은)이 삶아준 것이다. 정약전에게 침식을 제공하는 일을 맡은 가거댁은 가감 없는 입담으로 영화에 생동감을 더하는 캐릭터이자 나중에 정약전의 반려가 되는 인물이다. 또 돗돔은 정약전에게 퉁명스럽던 어부 창대(변요한)가 그의 도움을 받은 뒤, 미끼부터 남다른 공을 들여 잡아 온 것이다. 물고기에 해박한 창대가 『자산어보』 집필에 큰 도움을 주게 되리란 건 쉽게 짐작이 간다.

흑백으로 촬영한 영화 ‘자산어보’. 왼쪽부터 창대(변요한)와 정약전(설경구).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흑백으로 촬영한 영화 ‘자산어보’. 왼쪽부터 창대(변요한)와 정약전(설경구). [사진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한데 창대의 역할은 그 이상이다. 『자산어보』의 서문에 나오는 이름과 간략한 설명에 상상력을 크게 가미한 이 인물은 실존인물 정약전과 나란히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영화 곳곳에 풍부하게 등장하는 정약전·정약용의 실제 일화나 작품과 더불어 역사와 픽션이 매끈하게 어우러지는 새로운 맛을 낸다. 극 중 창대는 무지렁이 어부가 아니라 섬에서 보기 드물게 이미 글을 알고 제법 책을 읽은 청년. 창대는 정약전의 물고기 선생이, 정약전은 그의 학문 선생이 된다. 이 상호적인 사제관계는 나아가 서로 다른 생각의 대립으로 발전한다. 정약전이 지닌 급진적 사상이 영화에 드러나는 것과 나란히 성리학적 세계관에 순응하며 입신양명을 꿈꾸는 창대의 지향이 드러난다. 남 보기엔 출세를 하고 싶은 것이지만, 창대의 관점에서 보면 나름대로 배움을 실천하고 싶은 것이다.

‘자산어보’의 참맛을 꼽자면 바로 이런 대목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옳다, 그르다 쉽게 재단하는 대신 그 다름을 구체화하는 데 공을 들이고, 시대상과 맞물린 풍속화이자 인물화로 그려낸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흑백논리가 횡행하는 시대에 맛보기 힘든 시도이자 미덕이다.

영화에 나오는 먹거리 가운데 갑오징어는 그 쓰임이 좀 다르다. 특히 영화 후반에 다시 등장할 때는 비극적인 사회상과 맞물려 전혀 다른 효과를 낸다. 이래저래 뒷맛이 긴 영화다.

이후남 문화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