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무와 숲의 기록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730호 19면

하추로 낙엽송 여름,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145x110cm

하추로 낙엽송 여름,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145x110cm

엄효용(50) 작가의 나무 사진은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다. 품종이 같은 가로수 100~300개를 촬영한 후 컴퓨터로 정교하게 중첩해 한 그루의 나무, 하나의 숲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츄파춥스를 땅에 꽂아둔 듯한 소월로의 은행나무, 각설탕처럼 모양 잡힌 대학로의 버즘나무, 관광객을 모으는 담양의 메타세콰이어, 신도시가 생기면서 이식된 이름 모를 가로수들은 그의 손길을 거쳐 한 점 수채화가 된다.

우리가 놓쳤던 어느 일상의 기록 #엄효용 사진전 ‘진실의 실체가 나타날 때’

사진가 엄효용.

사진가 엄효용.

“교통 체증이 심했던 어느 출근길, 차창 밖으로 슬로비디오처럼 지나가는 가게와 건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불쑥 가로수가 눈에 들어왔어요. 아, 나무가 있었지.”
그는 이 순간을 ‘평범한 일상이 신비롭게 다가온 순간’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반복되는 일상을 지겨워하지만, 삶의 신비로운 순간은 바로 이 지루한 일상의 어느 찰나에 일어난다.

대관령 경강로 자작나무 여름, 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120x90cm

대관령 경강로 자작나무 여름, 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120x90cm

원남로 자작나무 여름,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120x90cm

원남로 자작나무 여름,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120x90cm

“우리 주변의 평범한 것들을 신비롭게, 대단하게, 낯설게 보이게 할 수는 없을까. ‘내 기억대로, 내 방식대로 이 나무들을 기억하고 싶다’고 결심한 건 그때부터였죠.”
그의 작업은 나무가 있는 길을 하염없이 걷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무가 많은 강원도, 제주도로 출장을 가면 해 지는 줄도 모르고 쏘다닌다. “나무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계절마다 바람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죽향문화로 대나무 숲 여름,2020,Pigment Print on Cotton Paper,36x48cm

죽향문화로 대나무 숲 여름,2020,Pigment Print on Cotton Paper,36x48cm

백두대간로 낙엽송 여름,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120x90cm

백두대간로 낙엽송 여름,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120x90cm

그는 왜 컴퓨터의 힘을 빌려 합성 사진을 만드는 걸까. 이전에도 카드·동전·자석 등 2개의 양면을 가진 피사체를 모아 수백장 중첩하는 작업을 해왔다. “사람들은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눕니다. ‘예스’ 아니면 ‘노’. 하지만 예스와 노 사이에는 수많은 단면이 존재하죠. 겉과 속, 앞과 뒤, 비움과 채움 등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실은 서로 의존하고 있어요. 내 작업 과정의 무수한 반복은 서로 대립하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숨겨진 조화를 담으려는 노력입니다.”

양재대로 은행나무 여름 ,2020,Pigment Print on Cotton Paper,90x120cm

양재대로 은행나무 여름 ,2020,Pigment Print on Cotton Paper,90x120cm

그의 작업은 호불호가 갈린다. 어느 술자리에선 “사진판에서 기웃대지 말고 그림판으로 가라”는 소리도 들었다. 한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사진이 너무 예쁘다”는 말로 불편함을 표했다.

20150916,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30x45cm

20150916,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30x45cm

20120723,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50x75cm

20120723,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50x75cm

20110719,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50x75cm

20110719,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50x75cm

“컴퓨터의 힘을 빌리긴 하지만 제 결과물은 단지 잘 조합된 한장의 사진이 아니라 ‘과정’의 축적입니다. 수많은 나무를 찍을 때 느꼈던 감정, 나무의 어떤 모습을 전달할까 고민했던 기억들이 내 작업의 바탕이죠. 나무와 마주쳤을 때 받았던 울림을 느끼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20171124,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30x45cm

20171124,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30x45cm

20200217,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30x45cm

20200217,2021,Pigment Print on Cotton Paper,30x45cm

이번 전시에선 하늘 연작도 볼 수 있다. 일상의 기록 시리즈 중 하나다. 엄 작가는 2006년부터 1년 365일 하늘을 촬영해왔다. 2013년부터는 ‘닮은 듯 다른’ 하늘 사진 365장으로 달력을 만들어 선물하고 있다. 2021년 달력에는 2019년 그 날짜의 하늘이 담겨 있다. 바로 지난해의 하늘이면 좋겠지만, 판매용이 아니라 혼자 작업하다 보니 2년이 걸린다고 한다. 4월 21일까지 갤러리 나우.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