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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 뒤흔든 한국계 빌 황…노무라·크레디트스위스 시총 8조 증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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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미국 월가의 한국계 투자자 빌 황(황성국)의 소식을 전한 파이낸셜 타임스(FT). [FT 캡처]

미국 월가의 한국계 투자자 빌 황(황성국)의 소식을 전한 파이낸셜 타임스(FT). [FT 캡처]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투자자 빌 황(57·황성국)이 일으킨 파문이 미국 증시를 뒤흔들고 있다. 황씨가 운영하는 아케고스캐피털이 대규모 투자 손실로 월가의 투자은행들에서 ‘마진콜’(추가 증거금 납부 요구)을 통보받았기 때문이다. 아케고스가 증거금을 채우지 못해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크레디트스위스·노무라 등이 강제로 처분한 주식은 300억 달러에 이른다.

5배 레버리지 투자 손실 불똥 #고3 때 미국 이주, UCLA대 졸업 #헤지펀드 로버트슨 밑에서 일해 #2012년엔 내부정보 이용 물의

강제 처분은 투자자가 투자은행 등에 담보로 제시한 주식 등의 가치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졌을 때 이뤄진다. 투자은행은 일단 전화를 걸어 담보가치가 부족해졌으니 담보를 보충하라고 요구한다. 아케고스가 마진콜에 응하지 못하자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는 지난 26일부터 경쟁적으로 아케고스가 담보로 제공한 주식을 팔아치웠다. 그런데 노무라와 크레디트스위스는 상대적으로 대응이 늦은 만큼 대규모 손실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파이낸셜타임스와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황씨는 최고 다섯 배의 레버리지(지렛대 효과)를 이용해 공격적인 투자를 해왔다. 이렇게 투자한 자산의 가격이 오르면 최고 다섯 배의 수익률을 노릴 수 있다. 하지만 투자한 자산의 가격이 내리면 손실도 다섯 배가 된다. 황씨의 실제 자산 규모는 50억~100억 달러로 추정된다. 그런데 아케고스가 투자했던 기업의 주가가 최근 급락하면서 황씨의 투자 손실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미국의 미디어 기업 바이어컴CBS와 중국 바이두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 22일 뉴욕 증시에서 100달러를 넘어섰던 바이어컴CBS의 주가는 지난 29일 47달러까지 하락했다.

노무라는 “한 미국 고객이 20억 달러를 빚지고 있다”고 공개했다. 노무라는 이 고객이 아케고스라고 밝히진 않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익명의 관계자를 인용해 아케고스와 연관돼 있다고 전했다. 지난 29일 뉴욕 증시에서 노무라의 주가는 전날보다 14% 급락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1분기 실적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입장을 냈다. 크레디트스위스의 주가는 지난 29일 11.5% 하락했다. 두 회사의 시가총액은 하루 만에 8조원가량 감소했다.

월가에선 옛 타이거펀드 출신인 황씨의 투자 행태가 현재 금융 시스템 취약점을 보여주는 것이란 점에서 바짝 긴장하고 있다.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Fed) 등이 참여하는 금융안정감시위원회(FSOC)는 31일 회의를 소집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이다. 주요 의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헤지펀드의 움직임 등이다. 이번 회의 일정은 사전에 예정한 것이지만 아케고스의 마진콜 파문과 금융회사의 손실도 논의 대상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

황씨는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금융 거래를 할 수 없던 신분이었다. WSJ에 따르면 그는 2012년 내부 정보를 이용한 거래를 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1600만 달러를 몰수당하고 4400만 달러의 배상금을 물었다. 그러다가 지난해 4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금융거래 제한 조치를 해제하면서 월가에 다시 등장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고교 3학년 때 미국으로 이주한 황씨는 UCLA대를 졸업한 뒤 카네기멜런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MBA)를 받았다. 현대증권을 거쳐 한때 세계 최대의 헤지펀드였던 타이거펀드의 줄리언 로버트슨 최고경영자(CEO) 밑에서 일했다. 이후 아시아 시장에 주로 투자하는 타이거아시아펀드를 운영하며 ‘새끼 호랑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강남규·김선미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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