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정부, 기업들이 비서실, 기조실 등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운영하는 참모 제도는 기원을 따진다면 군에서 찾을 수 있다.
모사(謀士)나 책사(策士)처럼 오래전에도 이런 역할을 수행하던 이들은 있었지만, 현대식 기관으로써 참모 제도는 독일군 초대 참모총장으로 일컬어지는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에 의해 탄생했다. 이후 발전을 거듭해 이제는 모든 군대가 따라 하는 보편적인 시스템이 되었다.
업무의 양이 많아지면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조직도 커진다. 과부하가 걸린 일을 여러 사람이 나눠 하면 당연히 생산성이 향상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규모가 커지고 업무가 분화되면 비효율성도 함께 늘어난다. 일단 결재나 협의 단계가 많아지면서 이전보다 의사 결정에 시간이 더 걸린다. 어처구니없지만 종종 최고 책임자까지 보고가 늦어져 낭패를 보는 경우까지도 있다.
최고 책임자에게 조직의 거대화로 나타나는 이러한 문제는 상당한 고민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마음으로는 모든 일을 챙기고 싶지만 아무리 부지런해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권한을 위임하고 중요한 것만 결정하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이때 힘을 발휘하는 것이 참모 제도다. 이는 최고 책임자의 결정을 돕기 위해 현황이나 문제점을 취합하고 대안을 만들어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참모의 기원인 군대에서 본다면 참모의 권한과 역할은 상당하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일선 부대에 직접 간섭할 수 없고 오로지 지휘관의 판단을 돕는 일만 담당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지휘관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참모 고유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과 소련이 벌인 독소전쟁은 정책 결정자와 참모진이 효율적으로 관계를 맺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 나타난 결과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독일이 연전연승하던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독일군 참모본부는 긍정적으로 작동되었다. 1939년 폴란드 점령 직후 프랑스를 침공하라는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이 이들의 격렬한 반대에 막혀 9번이나 실행이 연기되었을 정도였다.
독소전쟁 초기인 1941년에도 히틀러는 참모본부를 존중했다. 8월에 시작된 키예프 전투는 훗날 논란을 불어왔지만, 검토 당시에 참모진의 절반 정도가 찬성했을 정도여서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실행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반면 대숙청 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참모진을 무시하고 모든 작전에 일일이 관여했다. 무조건 현지 사수 명령만 남발하다 연이은 대패를 자초했는데 패배한 부대장을 소환해 사형시켰을 만큼 강압적이었다.
그래서 최고사령부가 급박하게 후퇴 명령을 내렸을 때 일선에서 스탈린의 사인이 들어간 공식 문서를 요구하는 모습까지 연출됐을 정도였다. 그렇게 소련은 전쟁 개시 석 달 만에 무려 약 400만명의 병력을 상실했다.
그러다가 그해 겨울 모스크바 전투를 기점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패배에 격노한 히틀러는 그때까지 독일의 승리를 이끌어 온 수많은 명장은 해임하거나 좌천시키고 자신이 직접 독일 육군 최고사령관에 올라 자살하는 그 날까지 모든 작전에 일일이 관여했다.
하다못해 최전선에 배치된 주요 기갑부대의 지휘도 직접 행사했다. 독일군 특유의 영민함을 자랑하던 참모본부는 히틀러의 명령만 출납하는 기관으로 바뀌었다.
반면 연이은 대패를 겪은 후 자신의 능력 부족을 깨달은 스탈린은 키예프 전투 패배 후부터 한발 뒤로 물러나 군부에 대한 간섭을 줄여갔다. 이처럼 히틀러와 스탈린의 태도가 바뀐 모스크바 전투부터 전쟁의 균형추가 바뀌었다. 그리고 결국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 사례에서 보듯이 아무리 시스템이 좋아도 이를 이용하는 이의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 어쩌면 무조건 나만 옳다는 고집스러운 신념이 가장 무서운 적일지도 모른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