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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영화는 동반자”…‘C급 영화’ 감독이 교단에 서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백승기 감독의 초저예산 패러디 SF 영화 '인천스텔라'. 사진 꾸러기스튜디오

백승기 감독의 초저예산 패러디 SF 영화 '인천스텔라'. 사진 꾸러기스튜디오

#. 27년 전 미지의 세계에서 도착한 구조신호. 주인공은 구조신호에 담긴 설계도를 토대로 우주선 인천스텔라를 만들어 과거의 비밀을 찾아 우주로 떠난다. 영화관 관객들의 표정에 당황함이 스친다. 익숙한 이야기지만 뭔가 이상해서다. 영화 속 우주선이라 불리는 물체는 1997년산 빨간색 스텔라 차량이다. 우주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부서 이름은 ‘NASA(미 우주 항공국)’에서 N이 빠진 ASA다.
구조신호를 보낸 별의 이름은 ‘감성’을 비틀어 부르는 ‘갬성’이다. ASA와 갬성이라 불리는 곳은 컴퓨터그래픽(CG)으로 만들어진 세트가 아니라 인천 월미도와 근처 야산이다. 곧이어 할리우드 우주영화에서 본 듯한 장면이 반복되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온다. 시종일관 물음표를 자아내는 이 작품은 지난 25일 개봉한 백승기(39) 감독의 작품 ‘인천스텔라’다.

자신 있게 인천스텔라를 고퀄리티 작품이라 소개하는 백씨는 자칭 ‘C급 영화’ 감독이다. 그에게 C급이란 소수 감독만 누릴 수 있는 A급, B급과 달리 누구나 영화를 제작할 수 있다는 의미다. C급이라고 해서 대충 만드는 작품은 절대 아니라는 게 백 감독의 설명이다. 그는 2014년부터 아바타를 패러디한 ‘숫호구’부터 최근 인터스텔라를 패러디한 ‘인천스텔라’까지 초저예산으로 ‘패러디 범벅’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장편 영화 4편은 모두 부천 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 초청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학교에서도 감출 수 없던 C급 감성

2017년 인천 신포시장 옥상에서 영화 촬영을 마친 백 감독과 스텝들. 사진 백승기 감독 제공

2017년 인천 신포시장 옥상에서 영화 촬영을 마친 백 감독과 스텝들. 사진 백승기 감독 제공

장편영화를 모두 영화제에 올릴 정도로 인정받은 감독이지만 백씨의 본업은 따로 있다. 미술 교사다. 처음부터 원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는 지난 2005년 뜻맞는 지인과 함께 영화제작사 꾸러기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일본에 지브리가 있다면 한국엔 꾸러기가 있다”며 자신감을 뽐내던 그였지만 자금 문제 등 현실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미술교육과 졸업증을 살려 기간제 교사가 됐다. 영화 제작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그의 ‘C급 감성’은 학교에서도 숨길 수 없었다. 학생들과 의기투합해 영화 동아리를 만들었다. 학교와 영화의 만남. 교사 겸 영화감독 백씨의 색다른 도전이었다. 중·고교 9곳을 거치면서 학생들과 만든 작품만 6개. 영화 ‘국가대표’를 패러디한 ‘학교대표’, 반에서 꼴찌 하는 원준이가 주인공이 돼 학교를 지키는 ‘출동 43호’는 백씨의 C급 감성과 학생들의 신선함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학생들은 창작의 원천이자 작업의 동반자라는 게 백씨의 말이다.

백 감독은 2018년 인천공항고등학교 교사 시설 영화동아리 학생들과 작품을 만들어 미림극장에 상영했다. 사진 백승기 감독 제공

백 감독은 2018년 인천공항고등학교 교사 시설 영화동아리 학생들과 작품을 만들어 미림극장에 상영했다. 사진 백승기 감독 제공

백씨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하듯 인천스텔라에는 백씨가 몸담은 학교와 학생들이 등장한다. 지난해까지 교편을 잡은 인천 인화여고가 그 주인공이다. 심지어 영화의 메인 캐릭터인 배우 강소연씨는 10년 전 그가 가르쳤던 제자다. 백씨는 “몇 안 되지만 저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영화 키즈도 있다”면서 “학생들은 제가 영화 앞에서 항상 진지할 수 있게 만드는 원천”이라고 말했다.

“겸업 버겁지만, 최대한 이어갈 것”

영화 '오늘도 평화로운' 촬영 당시 백 감독과 스텝들. 사진 백승기 감독 제공

영화 '오늘도 평화로운' 촬영 당시 백 감독과 스텝들. 사진 백승기 감독 제공

최근 인천스텔라가 개봉하면서 백씨는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낮에는 교실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저녁에는 영화관에서 관객들을 만난다. 올해는 1학년 담임까지 맡아 일이 늘었다. “학기 중 영화가 개봉한 건 처음”이라는 백씨의 말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힘이 닿는 한 두 가지 일을 계속하겠다는 게 백씨의 각오다. “사실 교사 백승기와 영화감독 백승기 모두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고 싶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아요. 아직까진 두 곳 모두 저를 필요로 하고 제가 보람을 느끼는 만큼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 10년째 교사 겸 영화감독 꼬리표를 단 백씨의 소망이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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