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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있게, 젊게, 당당하게 ‘70대 뉴룩’ 만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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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9호 18면

윤여정 패션 키워드

패션지 화보에서 흰색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를 입은 윤여정. 사진 보그(김영준 사진가).

패션지 화보에서 흰색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를 입은 윤여정. 사진 보그(김영준 사진가).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윤여정. 연기 경력 56년 차, 올해 74세인 이 배우는 ‘옷 잘 입는 할머니’로도 유명하다.

관행·트렌드·나이에 구애 안 받아 #드레스·셔츠·청바지 다 잘 어울려 #김민희 등 젊은 친구들 보고 배워 #동시대적 감각이 스타일의 핵심

검정 정장 바지에 흰색 셔츠,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검정 원피스, 스트라이프 티셔츠에 검정 오버코트, 도트 무늬 원피스와 점퍼, 베이지색 니트 스웨터와 카디건…. 공항패션이든, 레드카펫이든, ‘윤스테이’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든, 윤여정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모습들이다. 노년 여성들이 우중충해 보인다는 이유로 블랙&화이트 컬러를 피하고 원색과 화려한 무늬의 옷을 입을 때, 윤여정은 언제나 그 대척점에 서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심플하고 멋지다.

클래식의 가치를 아는 여자

젊은 시절의 윤여정. [중앙포토, 일간 스포츠]

젊은 시절의 윤여정. [중앙포토, 일간 스포츠]

특히 격식을 갖춰 입어야 할 때 그가 자주 입는 무릎길이의 검정 원피스는 1920년대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진취적인 여성들을 위해 만든 ‘리틀 블랙 드레스’로 모던함과 우아함의 상징이다. 체구가 작고 마른 몸매의 그가 만약 여느 여배우들처럼 화려한 컬러와 무늬, 요란한 레이스 장식으로 휘감긴 드레스를 입었다면 아마 옷에 몸이 파묻힌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패션잡지 ‘보그’의 신광호 편집장은 윤여정의 이런 패션 스타일에 대해 “유행이나 인기에 구애받지 않는 베이식(Basic)·클래식(Classic)·타임리스(Timeless)라는 키워드로 정의할 수 있다”며 “이는 패션 피플들의 종착역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윤여정 선생이 자주 들고 다니는 에르메스 ‘버킨 백’이나 ‘켈리 백’도 어떤 장소, 어떤 옷과 매치해도 잘 어울리는 클래식 아이템이다. 이 백을 드는 사람은 여럿 있지만 풀 세팅 정장이 아닌, 모노톤의 기본 셔츠와 바지 또는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청바지에 푸슬푸슬한 곱슬머리, 작은 알의 검정 선글라스와 매치한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렇게 그는 대한민국에 없던 자신만의 캐릭터로 ‘70대의 뉴룩’을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 ‘계춘할망’에 출연했던 김고은과 함께한 모습. 이날 윤여정은 ‘리틀 블랙 드레스’를 입었다. [중앙포토, 일간 스포츠]

영화 ‘계춘할망’에 출연했던 김고은과 함께한 모습. 이날 윤여정은 ‘리틀 블랙 드레스’를 입었다. [중앙포토, 일간 스포츠]

2013년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 출연 당시 남다른 패션 감각의 비결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배우)김민희가 패셔니스타라 옷을 잘 입는다. 그래서 김민희에게 먼저 쇼핑을 한 뒤 연락하라고 한다. 이후에 민희가 산 옷을 그대로 구입한다.” 이후에도 그는 여러 인터뷰에서 “함께 영화·드라마에 출연한 공효진·김효진·김고은 등 옷 잘 입는 젊은 친구들의 옷차림을 잘 관찰했다가 같은(스타일의) 옷을 산다”고 밝힌 바 있다.

간호섭 홍익대 교수(패션 디자이너)는 “젊은 친구들을 관찰하면서 배우고 새로움에 도전하는 동시대적 감각이 윤여정 스타일의 핵심”이라고 단언했다. “어떤 인터뷰에서 나이와 편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 모르는 분야에선 나이와 상관없이 늘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패션에도 이 철학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 같다.”

스트라이프 무늬 티셔츠에 검정 코트를 입은 모습. [중앙포토, 일간 스포츠]

스트라이프 무늬 티셔츠에 검정 코트를 입은 모습. [중앙포토, 일간 스포츠]

실제로 2013~2014년 방송된 ‘꽃보다 누나’ 출연 당시 그의 옷차림은 스무 살 이상 차이 나는 김희애·이미연의 패션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을 만큼 젊고 캐주얼했다. 스키니 청바지에 스니커즈는 기본. 오버사이즈 패딩이나 허리 위로 올라오는 짧은 길이의 보머 점퍼도 거뜬히 소화했다. 요즘 방송 중인 ‘윤스테이’에선 바지 밑단 통이 넓은 청바지에 래퍼들이 즐겨 입는 후드 티셔츠를 입고 등장했다.

2018년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포스터 작업에 참여했던 이한욱 스타일리스트는 “동년배 여사님들이 커다란 알 형태의 유색 보석을 좋아하는 데 반해, 윤여정 선생은 개인 소장품으로 쿨한 느낌의 플래티넘 또는 은 소재의 반지를 4개의 손가락에 착용했는데 특히 엄지와 새끼손가락에 착용한 모습이 요즘 젊은 친구들이 많이 하는 스타일이라 굉장히 멋스러웠다”고 후일담을 전했다.

‘윤여정다움’이 윤여정 패션을 만든다

고 다이애너비의 80년대 모습을 연상시키는 클래식 도트 원피스. [중앙포토, 일간 스포츠]

고 다이애너비의 80년대 모습을 연상시키는 클래식 도트 원피스. [중앙포토, 일간 스포츠]

패션 대모로 꼽히는 진태옥 디자이너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명동 ‘쎄씨봉’에 갔을 때 무대 위에는 송창식·조영남·이장희씨가 있었는데 마침 어떤 아가씨가 막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함께 갔던 친구가 ‘저 아가씨가 요즘 잘 나가는 신인 배우 윤여정’이라고 가르쳐줬다. 내가 알고 있는 여느 여배우들과 달리 청바지에 흰색 셔츠 차림의 깔끔하고 담백한 모습이 배우 같지 않아서 참 멋스러웠다.”

반세기 전 이야기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윤여정의 패션에는 ‘윤여정다움’이 존재한다. 지춘희 디자이너는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다. 벽이 없다. 나이라는 숫자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마인드가 패션에서도 잘 드러난다”며 “그 나이에 그렇게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말 한마디를 해도 맛깔스럽고 정확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윤여정 스타일이 패션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고 했다.

패션은 생활 철학이 드러나는 단면이기도 하다. 답답한 사람은 답답하게, 쿨한 사람은 쿨하게 입는다. 윤여정다운 패션은 당당함과 유머 감각이라는 바탕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어코(어깨에 코트를 걸치는) 스타일’로 차려입은 윤여정. [중앙포토, 일간 스포츠]

‘어코(어깨에 코트를 걸치는) 스타일’로 차려입은 윤여정. [중앙포토, 일간 스포츠]

그가 에르메스, 샤넬, 반클리프&아펠 등 초고가 럭셔리 브랜드의 매니아인 건 업계에선 이미 오래된 사실이다. ‘너무 사치스러운 것 아니냐’ ‘협찬 아니냐’ 쑥덕임이 커지자 2013년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속 시원하게 말했다. “다 내 돈으로 내가 벌어서 사는 것이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방탕하게 쓰는 게 아니라서 난 떳떳하다. 잘난 척하는 게 비굴한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얼마 전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에 출연해서는 “난 협찬을 안 받는 게 아니라 (브랜드가)안 해준다. 늙은 사람이 입으면 안 산다고. 그래서 다 내가 사 입는다. 그러니 열심히 일해야 한다”며 웃음폭탄을 날리기도 했다.

그의 유머 감각은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서 충분히 검증됐다. 최근에는 영화 ‘미나리’와 관련해 솔직하고 진심 담은 ‘윤 선생 영어’로 해외 인터뷰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유머 감각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재밌는 사람은 가까이 두고, 재미없는 사람은 멀리 한다”고 밝힌 바 있다.

LVMH 그룹 내 최고 경영자 중 한 사람이었던 미레유 갈리아노가 쓴 『프랑스 여자는 늙지 않는다』에서 나이 들수록 아름다워지는 프랑스 여자들의 비결을 묻는 말에 그는 “마음가짐이 바로 묘약”이라며 “당당하게 나이 먹기”를 조언했다. 윤여정도 마찬가지다. 그의 스타일은, 늙지 않는다.

서정민 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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