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輸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1667년 프랑스. 발작이 일어나면 자신의 아내를 때리고 집에 불을 지르는 남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 정신장애인을 루이 16세의 주치의인 장 드니에게 데려간다.

드니는 남자의 몸에서 3백cc 정도의 피를 뽑아내고 대신 송아지 피를 집어넣는다. 짐승의 피가 정신을 맑게 할 것이라고 믿은 탓이다. 하지만 남자가 숨지면서 드니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의사들에 의해 재판에 회부된다.

재판 도중 남자의 아내가 음식에 비소를 타 독살하고도 수혈로 죽은 것처럼 꾸몄음이 드러나면서 드니는 풀려나긴 한다. 하지만 그에 의해 짐승의 피를 수혈받은 다른 환자들이 숨지면서 수혈 행위는 오랫동안 금지된다.

인류 최초의 수혈(輸血) 행위는 이렇게 미신과 음모로 얼룩졌다. 당시 상반된 두 시각이 있었다. 드니처럼 피갈이를 통해 정신병 치료나 회춘(回春)이 가능하다고 믿는 신비주의와, 생명의 근원인 피를 함부로 다뤄선 안 된다는 엄숙주의적 관점이 그것이다.

혈액형이 다른 피가 섞일 때 적혈구가 파괴되는 원리를 몰랐던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실험'이 실패하면서 수혈은 금기가 됐다. 1678년 영국은 모든 수혈을 불법 행위로 규정하기도 했다.

1818년, 영국 의사 제임스 블룬델이 다시 금기에 도전한다. 위암 환자에게 사람 혈액을 수혈한 것이다. 환자는 일시적으로 증상이 나아졌으나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 그는 분만 후 출혈 환자들에게도 강행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병리학자 칼 란트슈타이너가 1901년 혈액형을 발견하면서 '수혈 기피 시대'는 막을 내린다. 수혈에 따른 부작용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제1,2차 세계대전 중 수혈은 수백만명의 목숨을 살린다. 이후 그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어느덧 인도주의 실천 운동의 중심에 헌혈이 자리잡았다.

최근 지구촌은 피가 모자라 난리다. 젊은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헌혈에 관심이 없고 군.학교 등에서의 집단 헌혈이 줄어든 데다, 에이즈 같은 혈액감염 질환이 늘면서 헌혈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탓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1%씩 혈액 수요가 느는데도 공급은 오히려 1%씩 줄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국내에서도 혈액 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재고가 바닥나 응급 환자들이 수술도 받지 못할 지경이라고 한다. 수혈 기피가 사라진 시대, 수혈난이 인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규연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