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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 'AMD' 아닌 '삼성' 모델로 반도체 왕국 재건 노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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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인텔이 돌아왔다. 오래된 인텔은 이제 새 인텔이 된다.”

팻 갤싱어 인텔 CEO가 23일(현지시간) 온라인 글로벌 미디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 인텔]

팻 갤싱어 인텔 CEO가 23일(현지시간) 온라인 글로벌 미디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 인텔]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가 23일(현지시간) 취임 후 가진 첫 공식행사에서 밝힌 포부다. ‘인텔 아웃사이드’ 위기에 처한 회사를 반도체 왕국 자리에 돌려놓을 거란 선언이었다. 돌아온 인텔이 새로워질 거란 설명도 덧붙였다.

파운드리 도전 선언한 인텔

지난해 10월 미국 애리조나주 오코틸로의 인텔 반도체 제조 공장의 모습.[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10월 미국 애리조나주 오코틸로의 인텔 반도체 제조 공장의 모습.[로이터=연합뉴스]

새로운 인텔의 핵심 사업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다. 겔싱어 CEO는 이날 온라인 미디어 브리핑에서 파운드리 사업 재진출을 선언했다. 겔싱어는 “반도체 설계에 집중하고 생산은 외주에 맡기는 업체와 협력해 이들이 설계한 반도체를 대신 생산하겠다”며 “세계 최대 수준의 지적재산(IP)을 고객사에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를 설립하고, 최소 200억달러(약 22조6000억원)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주 오코틸로에 신규 반도체 제조공장(팹) 두 곳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갤싱어는 “이번 투자로 애리조나 지역에 3000개 이상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보인다”며 “새로운 파운드리 서비스 구축을 위해 앞으로도 수백억 달러를 투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인텔 아웃사이드 위기’에 처한 반도체 왕국

미국 오리건주 힐스보로에 있는 인텔의 반도체 제조 공장의 모습. [사진 인텔]

미국 오리건주 힐스보로에 있는 인텔의 반도체 제조 공장의 모습. [사진 인텔]

한때 인텔은 ‘인텔 인사이드’란 광고카피를 앞세우며 전 세계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중앙처리장치(CPU) 반도체의 대부분을 만들던 회사다. 하지만 2년 전부터 주요 고객을 잃고 있다. 애플과 MS, 아마존은 인텔을 떠나 자체 CPU를 설계해 쓰고 있다. PC용 CPU 경쟁사인 AMD는 7나노급 반도체를 생산하며 인텔을 앞서고 있다.

인텔이 과거의 명성을 이어가지 못한 데는 반도체 업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 크다. 반도체 업계는 설계기업(팹리스)과 생산기업(파운드리)으로 분화하고 있다. 초미세공정 등 기술이 발전하면서 제조 공정이 고도화한 탓이다. 인텔처럼 설계와 생산을 동시에 하는 종합반도체기업(IDM)에는 불리하다. 경쟁사인 AMD는 생산을 대만 TSMC에 맡기고 설계에 집중해 품질 향상을 꾀했다. 인텔의 주주인 행동주의 펀드 서드포인트가 지난해 12월 “반도체 설계에만 집중하고 생산은 외부에 맡겨라”는 서한을 인텔에 보낸 이유다.

종합반도체기업(IDM) 성장 고수하는 인텔

지난해 10월 미국 애리조나주 챈들러에 있는 인텔의 반도체 제조시설.[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10월 미국 애리조나주 챈들러에 있는 인텔의 반도체 제조시설.[로이터=연합뉴스]

그럼에도 겔싱어는 인텔을 IDM으로 계속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설계뿐 아니라 생산 부문 역량을 키워 파운드리 분야로 외연을 넓히겠다는 것이다. 외주생산에 대해선 “제품 최적화와 납품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TSMC와 삼성전자, UMC 등 파운드리 업체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이미 외주를 주는 분야로 한정했다. 중앙처리장치(CPU) 등 핵심 제품은 여전히 자체 생산을 고수했다.

이날 겔싱어가 발표한 사업계획의 이름이 ‘IDM2.0’인것도 이런 이유다. 미 포브스는 “겔싱어는 (미디어 브리핑을 통해) AMD, 엔비디아와 같은 반도체 리더들이 포기한 IDM을 유지할 것을 분명히 했다”며 “인텔이 대규모 제조 시설을 매각할 것이란 소문을 일축했다”고 평가했다.

삼성전자 모델로 발전 노리는 겔싱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에서 2번째)이 지난 1월 경기도 평택사업장을 방문해 EUV 전용라인을 점검하고 있다.[사진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에서 2번째)이 지난 1월 경기도 평택사업장을 방문해 EUV 전용라인을 점검하고 있다.[사진 삼성전자]

인텔은 설계에 집중한 AMD보다는 삼성전자를 발전 모델로 삼은 듯 보인다. 삼성전자는 세계 반도체 업계에서 드물게 IDM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기업이다. 메모리 반도체와 모바일 AP를 자체 설계·생산하고 있지만, 파운드리 업계에서도 TSMC에 이어 세계 2위의 지위를 갖고 있다. 삼성전자처럼 파운드리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내 IDM의 위상을 유지하겠다는 게 겔싱어의 복안이라는 것이다.

인텔은 지난 2016년 파운드리 사업에 도전했다 2년 만에 사업을 접었다. 그럼에도 재진출을 선언한 건 파운드리 시장의 가능성 때문이다. 겔싱어는 “파운드리 사업은 2025년까지 1000억 달러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운드리 업계 3강 구도 재편 가능성

지난 1월 대만 신주현에 있는 TSMC 회사의 로고.[AFP=연합뉴스]

지난 1월 대만 신주현에 있는 TSMC 회사의 로고.[AFP=연합뉴스]

반도체 업계는 인텔의 도전으로 파운드리 시장이 TSMC와 삼성전자, 인텔의 ‘3강 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당장은 기술력 차이가 크다. TSMC와 삼성전자가 첨단 미세 공정 기술을 놓고 5나노에 이어 3나노로 경쟁하고 있지만 인텔은 7나노 생산도 애를 먹고 있다. 하지만 대규모 자금력을 보유한 인텔이 조만간 격차를 좁힐 수 있다는 예상도 많다.

겔싱어는 이날 TSMC와 삼성에 견제구를 날렸다. 그는 “인텔 파운드리 서비스는 모바일용 칩 등을 다양하게 제조할 것”이라며 “고객사로 아마존과 구글, MS, 퀄컴, 애플 등을 끌어올 것”이라고 밝혔다. 모두 TSMC와 삼성전자의 주요 고객이다. 로이터 통신은 “인텔이 TSMC와 삼성전자에 도전장을 내밀었다”고 평가했다.

인텔의 행보는 미국 정부의 반도체 육성 의지와도 연관이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미국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행정부의 최우선 사안”이라며 “미국 내 반도체 생산 확대를 위한 추가 정부 지원과 새로운 정책 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CNBC는 “미 정부가 인텔에 세제 지원 등의 혜택을 부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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