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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래불사춘’ 비참한 우리 가슴에도 희망의 싹 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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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8호 26면

시로 읽는 세상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은 이제 낡은 비유가 되어 삼월 꽃샘추위를 두고 흔히 쓰인다. 본래는 원치 않게 흉노 땅에 보내진 왕소군의 기구한 처지를 한탄한 시구였다. 동방규의 ‘소군원(昭君怨)’에 나온다. 오랑캐 땅에도 꽃과 풀이 없겠느냐만 마음은 겨울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 형편의 어긋남이나 정치 형국의 역류를 짚는 데 인용되기도 한다.

이성복 『다시 봄이 왔다』 #고통스런 인간 아우성 속에서도 #무사태평 삶은 끄덕끄덕 흘러가 #이중나선처럼 절망·희망 꼬였지만 #노목에 싹 트듯 봄날이 오길 기대

왕소군은 용모가 뛰어났지만 가난해서 화공에게 건넬 뇌물이 없었다. 화공은 그이를 추녀로 그렸다. 궁녀가 되는 과정에도 궁중 생활에도 타국에 던져질 때도, 그 세상에 공정이란 것이 없었다. 계층 차와 정치적 타락이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녀는 한과 흉노의 화평에 기여했으나 불행한 타향살이를 했다고 전해진다. 시인은 무심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유정한 인간의 비애를 대비해 노래했다.

어느 국어 선생님이 한 잔 술도 없이 전화로, 이성복 시인의 시 ‘다시 봄이 왔다’를 꺼내는 바람에 들었던 생각들이다. 그 시가 수능 교재에 실려 있다는 것이었다. 고교생들이 읽기엔 좀 어렵겠네, 짐작하며 저 시구를 들어, 시에 대해 몇 마디를 보태었다. 그런데 어딘가 미진한 듯해서 여러 번 읽어 보았다. 앞부분 세 문단이다.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보다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자연에는 봄이 왔다. 풀이 자라고 노목에도 싹이 났다. 그런데 인간의 봄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기다리는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는 문장은 통상적인 경험과 어긋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다림의 대상은 안 오기도 하지만 오기도 한다. 그래서 이 진술은 상식을 깬다. ‘기다리는 것’은 돋아날 “싹”이겠지만, 달리는 화자가 이 세상을 벗어나는 때를 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해서 태어나지 않았고, 죽지 않을 수 없으며, 번식해야 하고, 다른 생명체를 먹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식물과는 다른 이 생존방식을 고수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엔 반드시 피가 흐르게 돼 있다. 시인은 이를 ‘생·사·성·식’의 굴레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불가능성’으로 부른 바 있다. 사랑의 기쁨과 죽임의 폭력이 딴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 같아도, 다 이 굴레 하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비참한 현실은 모두에게 “더디고 나른한 세월”로 감각된다. 우리가, 운명의 사형수임을 알고도 모르면서 태연히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과 비참에 차별성이 없다. 이 무차별성이 곧 화자의 고통일 텐데, 고통스런 인간의 삶이 고통 없는 나무의 삶으로 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싹 틔울 수 있을까. 그러나 물음은 혼잣말에 그친다. 그것은 우리가, 이곳과 이곳 아닌 곳에 동시에 설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혜를 묻는 인간의 입은 곧 쾌락을 먹는 동물의 입이다.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는 먹는 혀와 먹히는 비계=살을 결합한 비유다. 이 비유의 문맥에서 인간은 욕망을 매개로 하여 세계에 결박돼 있다. 삼차원의 인간은 사차원의 미지를 모른다. 그래서 늘 세계의 진상을 보지 못하고 낡은 유리창 너머의 흐릿한 풍경, 즉 삶의 가상만을 보게 된다. 더디고 나른한 그림. 진짜 현실을 가린 그림. 시의 뒷부분은 이렇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 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 죽이면 가슴엔 윤기 나는 석탄층이 깊었다

플라톤의 동굴 속 수인(囚人)을 생각해도 좋고, AI가 지배하는 ‘매트릭스’ 속 네오를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곳에서 살고 있다. “고무 호스”와 “물줄기”의 이미지는 처절하고 격렬하지만 찻잔 속 태풍에 그친다. 즉, 벗어남은 없고, 고통의 아우성 속에서도 무사태평한 삶은 끄덕끄덕 흘러간다. 화자는 이제 “풀잎 아래” 낮게 엎드렸다. 기진해서 보는 “윤기 나는 석탄층”에 희망이 있을까. 우리는 우리가 아는 곳에서 그저 죽어 있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석탄의 윤기도 빛이라면, 절망은 드러나 있고 희망은 숨어 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은 이 시인의 다른 문장,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그날’)와 속뜻이 같다. 그 문장 밑엔 아마, ‘나는 바로 그 사실이 아프다’라는 신음이 들어 있을 것이다. 시는 봄을 어둡게 그렸지만, ‘불사춘’의 현실을 정직하게 앓아 내는 가슴에 희망의 싹이 튼다고도 말해 준다. 절망과 희망은 DNA의 이중나선처럼 꼬여 있다.

‘프레임’이니 ‘진영’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어가 됐다. 프레임은 씌워서 가르는 것이고, 진영은 맞서는 세력들이다. 오래된 사이에도 정견이 안 맞아 얼굴을 붉히는 일이 적잖이 생긴다. 이해는 된다. 더 답답한 것은 진영들 내부일 것이다. 동굴일까 매트릭스일까. 태양은 나타나고 저항군의 메시지는 들려올까. 그것이 어렵지만 가능하리라고 시는 벌써 말한 듯한데. 고교생들도 열심히 읽고 있는데. 어디선가 많이 본, 그 봄이 다시 왔다.

이영광 시인·고려대 교수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계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서정성과 불온함이 공존하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집 『끝없는 사람』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 등을 냈다.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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