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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다 떠난 성폭력 희생자여, 그곳에선 괜찮은가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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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4호 24면

시로 읽는 세상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한 장면. 주인공 할머니가 외손자도 연루된 성폭력으로 희생당한 여학생의 생전 흔적을 찾아다닌다. [중앙포토]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의 한 장면. 주인공 할머니가 외손자도 연루된 성폭력으로 희생당한 여학생의 생전 흔적을 찾아다닌다. [중앙포토]

시인들은 시가 막힐 때 흔히 시가 안 된다고 하지 않고 시가 안 온다고 말한다. 시는 시인의 말이 아니라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라는 듯이. 시가 안 온다는 것은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일 텐데, 영감의 영(靈)자는 신령이고 귀신이라는 뜻이다. 접신은 드문 일이니 시인들이 영감에 붙잡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영화 ‘시’ 속의 시 ‘아네스의 노래’ #외손자가 성폭력 연루된 주인공 #희생된 여학생 흔적 찾아다녀 #사력 다한 부름에 원혼도 응답 #괴로운 현실 감당한 뒤 시 완성 #고통받은 두 목소리 함께 울려

영감을 받는 방법 중 하나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서 작가 포레스터는 중학생 자말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말, 생각하지 말고 써. 생각하면 늦어.” 창작에는 이런 비논리가 있다. 정확하지만 더딘 단계적 사고로는 상상의 바다에 명멸하는 영감을 포획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번뜩이는 직관을 믿고 취한 듯 속기한 뒤에 생각하라는 것.

#말이 먼저고 뜻은 나중이라는 이 생각=영감론은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된 것이다. 영감과 시인 사이에는 상식과 통념이란 장벽이 놓여 있다. 제도와 규범으로 경직된 이 울타리 너머의 말들을 들으려면 역시나 제정신이나 계산속을 좀 내려놔야 할 것 같다. 시인들이 때로 딴 세상에 사는 듯 보이는 것도 이와 관계가 깊다.

영감이란 기실 우리 정신 심부의 낯선 존재들이 발하는 신호에 가깝다. 분명하되 안전한 의식 너머에 감춰진 낯설고 불편한 얼굴과 말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들은 상식의 저지선 너머에서 어떤 진실의 메시지를 타전한다. 이런 때 시 쓰기는 정신없는 중얼거림이거나 맞춤법에 서툰 초등생의 받아쓰기를 닮는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인 양미자 할머니는 시를 써 보려고 창작 교실에 나가는데, 강사인 시인은 그녀에게 사물을 제대로 보라고 가르치고, 그녀는 그 가르침을 잘 따른다. 본다는 것은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이 바로 외손자가 연루된 성폭행 사건이다.

영화는 사물을 보는 일에 현실을 보는 일을 포개 놓는다. 사과와 꽃과 나무에서 시상=영감을 찾는 일과 성폭력 희생자인 여학생의 고통을 감당하는 일이 하나라는 것. 사건을 덮기에 급급한 학교와 학부형들의 일그러진 행태와는 달리, 양미자는 보이지 않는 진실의 부름에 쫓기며, 죽은 박희진 아네스의 생전의 흔적을 찾아다닌다.

아이의 영결미사가 집전되는 성당, 범행 장소였던 학교의 과학실, 아이가 몸을 던졌던 다리 위를 두려움에 떨며 짚어 가는 할머니의 궤적을 영화는 생생히 보여 준다. 아름다움을 메모하는 그녀의 문장에는 저도 모르는 새, 아픔과 피와 저 세상의 이미지가 스며들어온다. 영화는 온갖 괴로움을 딛고 감춰진 진실과 마주하는 일 자체가 시 쓰기의 과정임을 환기한다.

사물을 본다는 것은 안 보이는 것까지를 투시한다는 뜻이고 가짜 현실 너머의 현실, 즉 죽은 혼의 고통에 응답하고 그것을 함께 앓는다는 뜻이다. 그녀의 시적 기투는 어떤 불가해한 공감 능력과 극한의 상상력을 일러준다. 그녀는 치를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치른 뒤에야 겨우 ‘아네스의 노래’란 시를 쓸 수 있다. 영화의 결말에서 시의 첫 연은 할머니의 목소리로 낭송된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그녀의 어려운 처지와 힘겨운 노력이 행간에 배어난다. 당신, 그곳에서 괜찮은가요. 미지와 어둠의 세계에 말 건네기. 또는 아이의 부름에 대답하기. 그러나 다음 연부터 낭송은 아이의 목소리로 바뀐다.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이것은 아네스의 응답이다. 괜찮습니다, 모두가 괜찮기를. 어린 그녀에게도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럼에도 원혼이 원한 없이 답하는 것은 사력을 다한 주인공의 부름에 힘입어서일 것이다. 그녀가 아네스가 되어서, 또는 아네스가 그녀에게 빙의되어 내는 이 목소리는 사실, 누구 것이라 말하기 어렵다. 두 목소리는 함께 울린다.

#우리 사는 세상에 고통이 너무 많다. 밟히고 죽어 나가는 약자들의 목록에는 남녀노소 구분도 없다. 이 사회가 고통을 만드는 기계나 공장으로 설계된 게 아니라면, 그 원인은 고통을 외면하는 어두운 심성, 타락한 시대 풍조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나는 가령,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 같은 이를 ‘살아 있는 아네스’라 생각한다. 이분은 무엇보다도, 부당 해고와 국가 폭력의 피해자이다.

그리고 진실의 전파자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고통받는 과부와 고아의 얼굴로 찾아와 인간의 마음을 부여잡되 압도하는, 이름 없는 타자=이방인을 영접하는 일의 중요성을 말한 바 있다. 박희진 아네스는 순정한 시인 양미자에게 나타나 진실을 전해 준 내면의 이방인이었다.

김진숙 아네스는 10년 전에 크레인에서 내려왔지만 다시 천릿길을 걸어, 청와대 앞에 섰다. “내가 보이십니까?” 레비나스는 이 목소리를, 호소나 간청이기에 앞서 윤리적 ‘명령’이라고 규정했다. 침침한 등불 아래서 나는 듣는다. 그리고 이 목소리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받아써 본다.

이영광 시인·고려대 교수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계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서정성과 불온함이 공존하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집 『끝없는 사람』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 등을 냈다.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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