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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밥맛! 총체적으로 밥맛!" 이 노래 영어 원문은 뭘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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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위키드'의 두 주인공 엘파바(왼쪽, 옥주현 배우)와 글린다(정선아 배우). [사진 클립서비스]

뮤지컬 '위키드'의 두 주인공 엘파바(왼쪽, 옥주현 배우)와 글린다(정선아 배우). [사진 클립서비스]

 영어 단어 ‘loathing(로딩)’은 증오 또는 혐오라는 뜻이다. 비슷한 뜻의‘hatred’‘disgust’ 보다 어려운 단어. 2003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뮤지컬 ‘위키드’엔 ‘로딩’을 중심으로 하는 노래 ‘What is this feeling (이 낯선 느낌)’이 나온다. 두 여성 주인공이 학창시절 만나 느낀 아주 나쁜 첫인상을 노래하는 이중창이다.

"더 좋은 단어 찾는 퍼즐 맞추기" 뮤지컬 번역의 세계

미국에서 입장권 판매 수익 10억 달러(약 1조 1300억원)을 2016년 달성한 인기 뮤지컬 ‘위키드’는 2012년 영어 버전으로 한국 공연했다. 이듬해 한국어 공연을 시작했고, 올해 2월부터 네번째 한국어 공연을 블루스퀘어에서 진행 중이다. 여기에서 ‘로딩’은 어떤 한국어 단어로 부르고 있을까.

답은 ‘밥맛’이다. “뭐라고 할까/당황스러운 너의 정체는/ 예! 예스! 밥맛! /총체적으로 넌 밥맛!”(“Fervid as a flame/Does it have a name?/Yes! loathing/Unadulterated loathing”)  원곡에서‘로’와 ‘딩’의 두개 음이 반복되는 노래는 경쾌하기 때문에 ‘증오’ ‘혐오’라는 말은 지나치게 무겁고 거창하다. 대신 입에 붙고 학생들의 말로도 어울리는 ‘밥맛’은 유머러스하게 노래를 이끌어간다.

‘밥맛’을 선택한 사람은 번역자인 이지혜씨. 뮤지컬 작곡가이기도 한 그는 본지와 전화 인터뷰에서 “후보 단어가 많았다”고 말했다. “‘재수’‘진상’‘우웩’을 생각해봤는데 음악과 잘 맞지 않았다”며 “로딩의 ‘딩’처럼 잘 들리는 음절이 필요했고 비읍이 들어가는 단어를 선택했다”고 했다.

뮤지컬 '위키드'의 번역가인 이지혜씨. [사진 이지혜씨 제공]

뮤지컬 '위키드'의 번역가인 이지혜씨. [사진 이지혜씨 제공]

이씨는 2004년 ‘아이러브유’로 시작해 ‘맨 오브 라만차’의 한국어 개사와 ‘위키드’ 영어 공연의 자막도 담당했다. 그는 뮤지컬 노래 번역에 대해 “한국어를 잘 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작품 전체의 세계관을 파악해 한국어로 어느 정도의 ‘언어 세계관’을 정립할지 결정하는 감각도 중요하다”고 했다.

외국어로 된 뮤지컬을 한국 공연할 때 이들이 필요하다. 뮤지컬 노래 번역가는 영어와 한국어 능력 뿐 아니라 뮤지컬 작품의 드라마와 의도를 간파하는 센스도 있어야 한다. 또한 음악을 바꾸지 않으면서 언어만 변경해야 하기 때문에 음악을 다뤄본 사람이어야 한다.

뮤지컬 번역가인 박천휘씨도 이러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라이센스 뮤지컬 제작 과정에서 통역을 하다가 번역가로 데뷔했다.  2007년 뮤지컬 ‘쓰릴미’로 시작해 ‘스위니 토드’초연,‘레베카’‘엑스칼리버’‘빅피쉬’의 개사를 맡았다. 올해 6월까지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팬텀’과 이달 28일까지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공연 중인 ‘베르나르다 알바’의 번역을 했다. ‘다윈영의 악의기원’과 ‘작은아씨들’ 등 뮤지컬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적당한 단어를 찾아냈을 때 만족하지 않고 끝까지 집요하게 더 좋은 가사를 찾는 퍼즐 맞추기와 같은 일”이라고 했다.

박씨는 “무엇보다 길이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영어를 한국어로 그대로 옮기면 길어진다. 한시간반짜리 영어 연극은 한국어로 두시간이 넘어간다. 같은 음악에 한국어를 넣을 땐 함축된 단어를 써야 한다.” 영화나 책 번역과 달리 뮤지컬 노래 번역에서 특별히 필요한 조건이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오프닝이 대표적이다. 영어 가사는“Once Upon another time/In a little town in Spain/There live a woman and her five daughters/Bernada was the woman’s name”. 직역하면 “지금과는 달랐던 과거 어느 시대에/스페인의 작은 한 마을에서/한 여자가 살았어 그녀의 다섯 딸들과/그 여자의 이름은 베르나르다 였지”다. 하지만 음표에 맞도록 간결하게 만들어 “옛날 옛적 스페인/어느 작은 마을에/딸 다섯을 둔 엄마가 있어/베르나다가 그녀 이름”이 됐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중앙포토]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중앙포토]

원작 국가의 사고방식, 역사, 문화에 대한 이해도 해야 한다. 이지혜씨는 “미국 관객들이 웃는 부분에서 한국 사람들도 웃도록 하는 일에 집중을 했다”고 했다. 그는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보며 영어 대본에 관객들이 웃는 부분을 일일이 체크했다. 또 ‘위키드’의 남자 주인공 피에로는 미식 축구만 잘 하고 생각이 얕은 부잣집 아들. 미국에서는 전형적인 캐릭터다. 이씨는 “한국어로 피에로를 묘사하는 말, 피에로의 말투 같은 것들을 고심해서 정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만든 한국어 가사는 공연을 거듭하면서 변화한다. ‘위키드’에서 공주풍 캐릭터인 글린다가 긴 머리를 탁탁 넘기며 하는 가사는 2016년까지 “샤방샤방”이었는데 올해 공연부터 “샤샥”으로 바뀌었다. 원어는 “toss toss”다. 이씨는 “샤방샤방이라는 말이 몇년 전까지는 통했지만 지금은 어딘지 낡은 느낌이다”라고 했다. 피부가 온통 초록인 주인공을 놀리는 말도 “브로콜리(원어도 broccoli)”였지만 올해 공연에서 “샤인 머스캣”으로 바꿨다.

뮤지컬 번역을 담당하는 박천휘씨. [사진 박천휘씨 제공]

뮤지컬 번역을 담당하는 박천휘씨. [사진 박천휘씨 제공]

2000년대 초반부터 뮤지컬 번역을 한 두 사람은 고충도 털어놨다. 박천휘씨는 “뮤지컬 번역과 개사는 가장 비전문적인 분야로 취급됐다. 연출이나 조연출이 부업으로 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작품 전체를 관통해 볼줄 알고, 음악과 언어에 전문적인 사람이 따로 맡아서 하는 것이 맞다”고 했다. 이지혜씨는 “누가 번역했는지는 신경을 크게 안 쓰는 분위기다. 들이는 품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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