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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인정이 이렇게 힘든가" 결국 울먹인 박원순 피해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 피해자가 사건 발생 이후 252일 만인 17일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60여 명의 기자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회견 마지막 순서에 단상에 오른 피해자 A씨는 "저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서, 한 사건의 피해자로서 제 존엄과 회복을 위해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꼭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며 직접 나서게 된 배경을 밝혔다.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공동행동(공동행동)은 이날 서울 중구 티마크그랜드호텔 3층 그랜드볼룸에서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라는 이름의 기자회견을 했다. 주최 측은 전날 회견 일정을 알리며 참가 신청서를 제출한 취재진 외에는 입장이 제한된다고 공지했다. 예고한 대로 A씨의 발언 순서에는 사진·영상 촬영과 녹음 등이 허용되지 않았다.

 17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호텔에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에 고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자리가 마련돼 있다. 사진 공동취재단

17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호텔에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에 고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자리가 마련돼 있다. 사진 공동취재단

기자회견장에 서약서 쓰고 입장

기자회견장은 엄숙한 분위기였다. 취재진은 시작 1시간 전부터 길게 줄을 섰다. 입구에서 접수를 확인한 취재진은 A씨와 관련한 촬영·녹음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한 후 이름표를 받아 차례로 입장했다.

첫 번째 순서로 피해자가 작성한 입장문 '더 늦기 전에 말하고 싶습니다'를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가 대독했다. A씨는입장문을 통해 "그분의 위력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저를 지속적으로 괴롭게 하고 있다"며 "그분의 위력은 자신들만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저를 괴롭힐 때 그들의 이념 보호 수단으로 활용됐다"고 말했다.

이후엔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서혜진 피해자 변호인단 법률사무소 라이트하우스 ▶이대호 피해자 전 직장동료 전 서울시 미디어비서관 ▶이가현페미니즘당 창당모임 공동대표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공동대표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권김현영 여성학자 순서로 발언을 이어갔다.

이수정 교수는 "딱 한 마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갑작스럽게 오늘 참여해달라는 청을 수락했다"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멈추어 달라. 서울시장, 부산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그 이전으로 대한민국은 돌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2차 가해를 멈추어달라"고 강조했다.

서혜진 고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 변호인(왼쪽 세 번째)이 17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호텔에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공동취재단

서혜진 고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 변호인(왼쪽 세 번째)이 17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호텔에서 열린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피해자와 함께 말하기'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공동취재단

"극단 선택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바뀌어"

뒤이어 A씨가 발언할 순서가 되자 주최 측은 취재진에게 카메라·마이크를 철수해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여성의전화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생중계하던 기자회견도 이때부터 음향 송출은 하지 않고 자막으로 대체했다. A씨는 참석자 중 가장 왼쪽 '피해자'석에 앉았지만, 영상에는 나오지 않았다. A씨의 옆에 변호를 맡아온 김재련(법무법인 온세상) 변호사가 동석했다.

A씨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있어 말하기는 의미 있는 치유의 시작이라고 한다"며 입을 뗐다. A씨는 회견문을 읽는 내내 울먹이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그는 "제가 겪은 사실을 사실로 인정받는 것, 그 기본적인 일을 이루는 과정은 굉장히 험난했다. 극단적인 선택으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가 바뀌었고, 고인을 추모하는 거대한 움직임 속에서 우리 사회에 저라는 인간이 설 자리가 없다고 느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제 피해 사실을 왜곡하여 저를 비난하는 2차 가해로부터 저는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사건의 피해자는 시작부터 끝까지 저라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직까지 피해 사실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께서 이제는 소모적 논쟁을 중단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면서 "방어권을 포기한 것은 상대방이다. 고인이 살아서 사법절차를 밟고, 스스로 방어권을 행사했다면 조금 더 사건의 진실에 가까워졌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고인의 방어권 포기로 인한 피해는 온전히 제 몫이 되었다"고 말했다.

기자들과의 질의응답도 있었다. 기자회견에 나서게 된 계기에 대해 A씨는 "선거가 치러지게 된 이유가 많이 묻혔다고 생각한다"며 "저는 저의 피해 사실을 왜곡하고 오히려 저를 상처 주었던 정당에서 시장이 선출되었을 때, 저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점을 묻는 말에 "신상 유출에 관한 내용"이라며 "수사기관에서 가명으로 조사를 받았고 저의 신상이 유출될 염려가 전혀 없었음에도 (가해자) 지지자들의 잔인한 2차 가해 속에서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어 "두 번째는 저와 함께 일을 했던 사람들이 2차 가해를 주도하고 있다는 면"이라며 "제가 일터에서 제가 저의 소명을 다해서 열심히 일했던 순간, 그러한 순간들이 저의 피해가 없었음을 증명하는 이유로 사유 되는 것에 굉장히 유감스럽다"고 덧붙였다. 박 전 시장 측이 A씨가 과거 박 전 시장에게 쓴 편지 등을 공개하며 반박한 것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

권혜림 기자 kwon.hye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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