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꼬우면 이직" 블라인드 글 수사 못하는데 고발…LH, 쇼였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LH 직원들이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린 자사 평가. “부동산 관련 정보가 많다”는 문구 등이 보인다. 블라인드 캡처.

LH 직원들이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올린 자사 평가. “부동산 관련 정보가 많다”는 문구 등이 보인다. 블라인드 캡처.

LH(한국주택토지공사)가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인 블라인드에 "꼬우면 (LH로) 이직하라” 같은 조롱성 글을 올린 작성자를 14일 경찰에 고발한 것을 놓고 이번에는 LH가 전 국민을 상대로 '쇼'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투기꾼 잡으랬더니 블라인드 잡겠다고?

익명 보장이 핵심 기술인 블라인드 시스템상 작성자를 알 수도 없고, 글을 올린 게 불법이 아니기 때문에 수사를 할 수도 없다는 걸 모를 리 없는 LH가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이벤트를 했다는 것이다.

블라인드에 게시된 LH 직원 추정 글. 인터넷 캡처

블라인드에 게시된 LH 직원 추정 글. 인터넷 캡처

LH는 "내부에서는 신경도 안 씀", "한 두달만 지나면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져", "차명으로 투기하면서 정년까지 꿀 빨면서 다니련다’" 등의 글을 블라인드에 올린 작성자들을 정보통신망법 제70조에 따른 명예훼손, 형법 제311조에 따른 모욕, 형법 제314조에 따른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수사기관에 고발조치 했다고 밝혔다. 또 작성자가 LH 현직직원일 경우 파면하겠다고 덧붙였다. 블라인드는 회사 이메일로 회원 가입을 하기 때문에 작성자가 LH 현직 직원일 것이란 분석이 많았다.

LH 인사관리처의 한 직원은 "해당 게시물은 LH 직원 및 가족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공연히 모욕하고 명예를 훼손했고, 부정여론 확산을 조장해 3기 신도시 등 핵심 정부정책 추진을 방해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변호사들 "처벌할 수 없는 일 갖고 LH가 국민 우롱" 

하지만 법률전문가들은 블라인드에 글을 올린 사람을 처벌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영장전담 판사로 근무했던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명예훼손이나 모욕죄 등의 수사를 위해 영장을 발부받으려면 피해를 본 대상자가 특정돼야 하는 데 이번 건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부장판사 출신의 또 다른 변호사도 "업무방해죄가 성립되려면 위계 또는 위력 등으로 업무를 방해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블라인드의 글을 보니 그런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대기업 법무팀에 있는 한 변호사는 "사내 변호사 등 법률 전문가가 많은 LH가 이런 자료를 냈다는 건 오히려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IT업계 관계자들은 블라인드의 기술 특성상 작성자를 못 찾는다는 걸 LH가 모를 리 없다고 말한다. 블라인드는 익명성 보장을 위해 회원 가입 시 데이터를 비공개 처리하는 특허를 가지고 있다. 회사 인증에 쓰이는 이메일은 곧바로 암호화되고 계정과 이메일 사이의 연결고리는 끊어진다.

IT업계 "익명성이 핵심인 블라인드는 어떡하라고" 

회원 가입 시 이용된 정보 자체를 삭제하기 때문에 비밀번호 찾기, 이메일 계정을 이용한 정보 열람 등도 불가능하다고 블라인드 측은 설명한다. 일부에서는 경찰이 서버 압수 수색 등을 통해 IP주소를 확인하면 글 쓴 사람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블라인드 관계자는 "블라인드는 IP 주소를 포함해 게시물 작성자를 특정할 수 있는 어떤 정보도 시스템 내부에 저장하지 않기 때문에 해당 글 게시물 작성자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네이버 출신의 문성욱 대표가 2013년 창업한 블라인드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익명으로 회사에 대한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다는 점이 부각돼 지난달 말 기준 국내 320만명, 미국에서 120만명이 서비스를 이용 중이다. 올해 초 카카오 추정 직원이 사내 인사평가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을 담은 ‘유서’ 형식의 글을 게재한 것도 블라인드다.

IT업계의 한 관계자는 "그럴 리 없겠지만 만에 하나 작성자가 누구인지 밝혀지면 익명성으로 사업하는 블라인드는 망할 수밖에 없다"며 "인성 나쁜 몇몇 직원의 글을 가지고 잘 나가는 IT 회사를 잡겠다는 LH의 발상이 기가 찰 노릇"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LH 관계자는 "우리는 작성자의 죄가 크다고 판단해 경찰에 고발했고, 경찰에서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밝힌 만큼 수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함종선·김정민 기자 ham.jongsu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