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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미스 수염씨가 외쳤다 "내가 조선의 레즈비언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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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 수염씨' 쇼케이스 장면. 사진 예술숲 제공

'미쓰 수염씨' 쇼케이스 장면. 사진 예술숲 제공

#1950년대 서울 비너스다방. 한 중년여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개화기 연예인 복혜숙 배우다. 의자에 앉은 그에게 “당신이 용동권번 출신이 맞느냐”는 질문이 날아온다. 복씨가 “그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냐”고 반문하며 회상이 시작된다. 가요·재즈·트로트·엔카 등 다양한 음악과 함께 1930년대 인천 용동권번 풍경이 펼쳐진다. 용동권번 출신으로 연예계를 호령한 복혜숙, 이화자, 유신방과 용동권번에서 연예인을 길러낸 가상 인물 ‘수염씨’가 등장한다. 대불호텔 파티장, 애관극장 등을 배경으로 풀어가던 이야기는 갑자기 한 무리 남성들이 나타나면서 절정을 맞는다. 남성들은 “당신은 보아하니 여자 같은데 왜 수염을 붙이고 다니느냐. 레즈비언이냐”라며 수염씨를 질타한다. “내가 조선의 레즈비언이다. 어찌할 건데?” 수염씨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응수에 나선 순간 무대는 막을 내린다.

용동권번 기생들의 도전 다룬 ‘미쓰 수염씨’

지난 6일 오후 5시 인천 송도 트라이볼에서 펼쳐진 뮤지컬 ‘미쓰 수염씨’의 쇼케이스 장면이다. 전체공연의 3분의 1인 약 40분 정도 장면만 선보였음에도 반응은 뜨거웠다. 이날 공연장을 가득 메운 80여명의 관객은 결정적인 순간에 공연이 끝난 것에 아쉬워하면서도 배우들의 열연에 격렬한 박수를 보냈다.

‘핫플’ 용동권번 이야기로 도전장

'미쓰 수염씨' 쇼케이스 장면. 사진 예술숲 제공

'미쓰 수염씨' 쇼케이스 장면. 사진 예술숲 제공

지난해 11월 인천문화재단은 ‘인천 가치와 문화가 담긴 공연콘텐츠 개발사업 쇼케이스 공모’를 진행했다. 공모에서 선정된 작품에 제작비를 지원해 30~40분 분량으로 쇼케이스를 열 기회를 주는 사업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어려움을 겪던 예술인이 잇달아 참가했다.

김면지 예술숲 대표도 도전장을 던졌다. 소재는 부평문화원 문화재연구원으로 일할 때 접한 인천 개항장 용동권번이었다. 개화기 권번은 기생에게 춤과 악기를 연주를 가르치는 곳이다. 대중가수와 배우 등 연예인을 양성하는 현재의 공연 기획사인 셈이다. 특히 인천 용동권번은 영화배우 복혜숙, 한국 영화계 선구자였던 나운규의 애인 유신방, 대중가수 이화자가 몸담았던 핫 플레이스였다. 용동권번 기생들은 당대 명인들과 호흡을 맞추며 틈틈이 독립운동과 교육기관을 위한 자금도 조달했다고 한다. 평소 이런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긴 김 대표는 용동권번 사람의 희로애락을 뮤지컬로 만들기로 했다.

오랜 기간 공연기획을 해온 그였지만 여성 서사가 중심이 된 공연은 처음이었다. 신중하게 접근하고 팀원들과 논의했다. 그 과정에서 ‘미쓰 수염씨’라는 가상 인물이 탄생했다. 여성이지만 남성처럼 수염을 붙인 캐릭터다. 김 대표는 여성을 뜻하는 ‘미쓰’와 남성의 상징인 ‘수염’을 모두 가진 이 인물을 통해 여성이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서사를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원제였던 ‘불온한 년들의 극장사’를 ‘미쓰 수염씨’로 바꾼 것도 주체적 여성인 수염씨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송스루(Song Through) 방식의 뮤지컬 ‘미쓰 수염씨’가 탄생했다.

정식공연 넘어 3부작 시연 꿈꾼다

왼쪽부터 작가&연출 사성구, 총괄프로듀서&연출 김면지, 작곡&음악감독 박경훈. 사진 예술숲 제공

왼쪽부터 작가&연출 사성구, 총괄프로듀서&연출 김면지, 작곡&음악감독 박경훈. 사진 예술숲 제공

지난해 12월 미쓰 수염씨는 인천문화재단 공모에 최종 선정됐다. 치열한 경쟁을 거친 만큼 더 나은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다. 김 대표는 무대에 오를 배우 13명을 하나씩 붙잡고 용동권번 역사를 설명했다. 인물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감정선을 잡기 어렵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코로나19라는 악조건에도 연일 맹연습을 이어갔고 지난 6일 무대에서 결실을 봤다.

이제 막 쇼케이스가 끝났지만 김 대표는 이미 그 이후를 준비 중이다. 인천 근대 역사 3부작의 1편인 미쓰 수염씨를 꼭 정식공연으로 선보이겠다는 게 그의 포부다. 그는 수염씨의 외침이 개화기 인천을 넘어 전 세계로 전해지길 바란다고 했다.
“극 중에서 수염씨가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지 말고 당당하게 수염을 달고 세상에서 살아 이기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극의 배경인 인천을 넘어 수염씨의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길 바랍니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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