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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순식간에 삼킨 쓰나미…만삭 아내는 무서울 겨를도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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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동일본 대지진으로 남편을 잃은 홍경임(왼쪽)씨. 딸(오른쪽)을 포함한 4남매를 홀로 키워냈다. 홍경임씨 제공

10년 전 동일본 대지진으로 남편을 잃은 홍경임(왼쪽)씨. 딸(오른쪽)을 포함한 4남매를 홀로 키워냈다. 홍경임씨 제공

재일동포 홍경임 씨는 바다에 가지 않는다. 10년 전인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남편이 쓰나미(津波)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고 일본에 와서도 미야기(宮城) 현 이시노마키(石卷)시 바닷마을에 살았지만 대지진이 모든 걸 바꿨다. 당시 그는 만삭이었다.

[동일본대지진 10년]

마을 소방대원이었던 남편 오오카베 유우키 씨는 아내에게 “바닷가 방파제만 살펴보고 돌아올게”라며 집을 나섰고,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지난 8일 통화에서 “지진 다음 날 아침 바다는 원망스러울 정도로 고요했다”며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 크고 무서운 파도가 몰아쳤던 곳이라곤 믿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쓰나미가 몰아치던 밤보다 아무렇지 않은 듯 고요했던 그 아침의 공포가 아직도 더 생생하다고 한다. 그는 “지금은 트라우마 때문에 바다에 못 가지만 죽으면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달라고 할 것”이라며 “남편이 있는 곳이니까”라고 덧붙였다.

2011년 대지진 당시 소방관들이 지진 해일과 화재로 온마을 초토화된 이와테현 게센누마에서 수색작업을 하고 있다. 중앙일보 고(故) 김태성 기자가 촬영한 사진. [중앙포토]

2011년 대지진 당시 소방관들이 지진 해일과 화재로 온마을 초토화된 이와테현 게센누마에서 수색작업을 하고 있다. 중앙일보 고(故) 김태성 기자가 촬영한 사진. [중앙포토]

지진 후 약 한 달 뒤 낳은 막내딸 에리나는 어느새 10살이 됐다. 큰딸 리사 양은 18살, 작은딸 리나 양은 16살, 아들 유지로 군은 14살이 됐다. 그도 어느덧 중년이다. 그는 “지진이 온 날 밤, 남편은 안 오고 뉴스에선 ‘시체 몇 구가 발견됐다’는 내용만 나왔다”며 “우는 아이들을 달래며 머릿속엔 ‘얘들은 이제 나밖에 없다, 내가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고, 더이상 무서울 겨를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아이들도 트라우마를 겪었다. 그림을 그리면 사람 얼굴엔 눈을 하나만 그렸다고 한다. 심리치료사들은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현실을 직시하기 힘든 아이들이 이런 그림을 그린다”고 설명해줬다. 그러나 아이들은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의젓하게 자랐다. 홍씨가 벽에 가득 붙여놓은 아빠 사진을 보면서도 행여 엄마 마음이 아플까 봐 아빠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쓰나미가 덮쳤던 이와테현의 최근 해변. 고요하다. 로이터=연합뉴스

동일본 대지진으로 쓰나미가 덮쳤던 이와테현의 최근 해변. 고요하다. 로이터=연합뉴스

큰딸과 작은딸의 꿈은 간호사, 아들과 막내딸은 의사가 되고 싶어한다. 4남매 모두 사람 목숨 살리는 일이 장래희망인 셈. 홍 씨가 “항상 남을 돕고 살자”고 가르친 것도 한몫했다. 홍 씨 본인이 지진 후 받았던 도움의 영향이 컸다. 그는 지진 후 일본 정부뿐 아니라 한국 측 도움이 긴요했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했다. 그는 “주일 한국대사관이나 영사관, 언론사에서 많이 도움을 줬고, 그 덕분에 일본 정부도 더 많이 신경을 써준 것 같았다”고 말했다.

홍경임씨가 홀로 키워낸 4남매. 씩씩하게 잘 자라 의사와 간호사가 꿈이다. 홍경임씨 제공

홍경임씨가 홀로 키워낸 4남매. 씩씩하게 잘 자라 의사와 간호사가 꿈이다. 홍경임씨 제공

소방대원이었던 남편의 연금도 있었지만 간병인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 '모범 사례'로 꼽을 정도다.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마음가짐으로 항상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정리와 준비를 해놓는다. 대지진 때문에 들인 슬픈 습관이다.

그는 “10년이 지났지만 아픔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그래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내다 때가 되면 (하늘나라로) 가는 거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목소리는 담담했다. 이시노마키를 떠나고 싶을 법도 한데, 바닷가에서 시내로 이사했을 뿐, 이주 계획은 현재로썬 없다고 한다. 운명을 거스르기보다, 받아들이고 순응하되 충실히 살아내는 삶을 택한 것이다.

그는 “인생은 덧없지만, 또 그렇기에 소중하다”며 “그저 살아있는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내가 도움을 받았듯이 남을 도우며, 삶의 마지막까지 살아내고 싶다”고 말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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