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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 외면한 동독 대학들, 통일 뒤 첨단 연구소로 탈바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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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6호 27면

독일 통일 그 후 30년 〈5〉

구동독 시절인 1975년 라이프치히 카를마르크스대학 본관. 이 대학은 충성심이 강한 공산주의 간부 양성기관으로 유명했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구동독 시절인 1975년 라이프치히 카를마르크스대학 본관. 이 대학은 충성심이 강한 공산주의 간부 양성기관으로 유명했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지구상 사회적 격변이 일어나는 많은 곳에서 대학생들이 앞장서서 싸우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에서 1960년과 87년이 그러했고 90년 중국의 천안문 사태와 현재의 미얀마와 벨라루스의 상황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동독 교수 대부분 사회주의 당원 #규율 복종 대학생들도 특혜받아 #전환기 시민운동 때 제 몫 못 해 #훔볼트·라이프치히대 등 시설 좋아 #서독·외국 학생들에게도 인기 끌어 #전문대학은 일자리 창출에 큰 공헌

그러나 동독에서는 달랐다. 89년 가을 노동자들과 직장인들은 의사 표현의 자유와 여행의 자유를 외치며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로 나섰던 반면에 대학은 이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동독에서는 교수와 대학생 모두 언제나 사회주의 체제의 수혜자들이었다. 다수의 교수는 사회주의통일당(SED) 당원으로서 정권과 밀접한 관계였다.

라이프치히 시민 시위 때 대학은 침묵

동독 건국 40주년을 기념해 자유독일청년단이 횃불행진을 벌이고 있다. [사진 젤리거]

동독 건국 40주년을 기념해 자유독일청년단이 횃불행진을 벌이고 있다. [사진 젤리거]

대학생들도 특혜를 받은 셈인데, 한 해 출생자 중 12%만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교와 전공의 선택은 정해진 지침에 따라야 했다. 예를 들어 계획경제의 틀 내에서 대학 입학생들의 40%는 공대에 진학해야 했다. 대학생이 된 후에는 충성심이 강한 청년조직 간부들의 통솔 아래 그룹별로 규율에 복종해야만 했으며 추수 작업 또는 군사 훈련에 언제라도 참여할 준비가 돼 있어야만 했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거의 모든 대학생은 장학금을 받았으며 기숙사 생활을 보장받았다. 게다가 대학 졸업 후에는 안정적인 직장을 갖게 됐다.

물론 이와는 다른, 체제에 저항하는 대학생들도 있게 마련이다. 46년 베를린의 전통 명문 훔볼트대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공산체제의 감시와 강압적인 조치들이 늘어났다. 그러자 학생들은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공산정권의 박해가 시작됐다. 일부 학생은 소련으로 끌려가서 처형되기까지 했다. 이에 많은 학생이 자유로운 서베를린으로 탈출한 후 새로운 베를린자유대학의 설립을 추진했으며 48년 그 결실을 보게 됐다.

동독에 도착한 57명의 북한 유학생들. [사진 젤리거]

동독에 도착한 57명의 북한 유학생들. [사진 젤리거]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동독의 모든 대학생은 전공과 관계없이 3년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워야만 했다. 독일의 전통 있는 대학에서는 빌헬름 폰 훔볼트가 19세기 초에 대학 개혁을 단행한 이후부터 연구와 강의의 통합이 하나의 특징이었지만 동독 시절에는 소련의 방식에 따라 연구 기능은 과학원이나 사회과학원과 같은 기관으로 이관되는 경향이 강했다. 이 기관들은 전통 있는 대학들보다 SED가 직접 관리하기가 훨씬 용이했다.

대학들도 물론 공산주의 노선을 따르는 데 충실했다. 라이프치히의 카를마르크스대학이 특히 그랬다. 북한을 포함한 많은 외국 학생이 이 대학에서 어학연수를 했는데 슈타지의 도청이 심했다. 언론인들은 대학의 ‘붉은 수도원’에서 특히 체제에 충직한 자원으로 양성됐다. 언론학과는 SED 중앙위원회 소속인 선전선동국의 직접적인 관리 감독 아래 놓여 있었다.

통일로 향하고 있던 전환의 시기에 이 대학은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후 청산 작업에 특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91년 2월이 돼서야 동독 시절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자연과학자였던 코르넬리우스 바이스가 새 총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라이프치히는 SED 권력에 맞서 최초로 수천 명의 사람이 월요시위에 참여하고 거리로 나온 ‘위대한 도시’였는데, 이곳에 있는 대학은 그와는 달리 시대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학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방관하며 변화의 과정이 이미 한참 진행된 시점에도 스스로 민주적인 청산작업을 진행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카를마르크스대학이라는 교명도 91년이 돼서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바뀌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이듬해인 90년이 되자 당시 동독 전역에서 더 이상은 체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3월에 치러진 민주적 방식의 총선 이후 5월이 되자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의를 담당하는 교수직과 강사직을 모두 없애기로 했다. 또한 법학이나 교육학 등 다른 전공 분야에서 사회주의 전력이 있는 교수들도 사임해야만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온건한 수준에서 마무리됐으며 조기퇴직 규정이나 충분한 연금을 지급함으로써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서독보다 교수 1인당 학생 비율 낮아

13세기에 지어진 라이프치히의 장크트 파울리 대학교회는 사회주의 도시 개조 작업의 일환으로 1968년에 폭파됐다. [사진 젤리거]

13세기에 지어진 라이프치히의 장크트 파울리 대학교회는 사회주의 도시 개조 작업의 일환으로 1968년에 폭파됐다. [사진 젤리거]

슈타지대학은 90년 1월 해체됐으며 경제학과 경영학, 사회교육학 등과 같이 시장 경제 체제에서 중요한 전공 학과들이 신설됐다. 새로 생겨난 단과대학의 초대 학장 자리는 예외 없이 모두 서독 출신들로 채워졌으며 수백 명에 달하는 강사들이 투입돼 초반에는 매우 열악한 물리적 환경에서 강의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 상황을 두고 모든 것이 서독에 흡수됐다고 할 수는 없다. 한스 요아힘 마이어 학술부 장관은 94년 12월 작센주에서 다음과 같은 통계를 발표했다. “총 1762명의 교수를 초빙했는데 그중 66%인 1164명은 신연방주 출신의 학자와 예술가들이었으며 559명이 서독 지역 출신이었고 39명은 외국인이었다.”

통일 이후엔 동독 지역 대학들과 전문 대학들이 새로 설립되거나 탈바꿈했다. 특히 전문 대학들은 일자리와 지역 인구 유지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베를린의 훔볼트대학이나 라이프치히대학 그리고 드레스덴대학과 같은 대학들은 얼마 가지 않아 서독의 대학생들과 외국 학생들에게도 매력 있는 대학으로 변모했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 앞에 있는 빌헴름 폰 훔볼트 동상. [사진 젤리거]

베를린 훔볼트 대학 앞에 있는 빌헴름 폰 훔볼트 동상. [사진 젤리거]

이들 대학의 경우 교수 1인당 학생 비율이 서독의 대학들보다 훨씬 적었으며 새로 갖춘 시설과 장비들도 현대적이고 뛰어났다. 예나의 기술 분야 첨단 연구소나 할레의 경제연구소와 같은 좋은 연구소들이 생겨났으며 에버스발데에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중점 목표로 하는 대학이 활동을 시작했다.

폴란드와의 국경 도시인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더에 위치한 비아드리나대학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 대학은 원래 1811년까지 존속했는데 폴란드와의 관계 발전에 도움을 주는 동시에 전체 유럽 통합에 기여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1991년 유럽대학이라는 명칭으로 다시 설립됐다. 이제는 이곳으로부터 오더강에 설치된 짧은 다리 하나만 걸어서 건너면 폴란드 국경 도시인 수비체에 갈 수 있다.

동독의 대학들은 통일과정을 피동적으로 따라가긴 했지만 교육 부문을 개혁하는 데 주도적인 활동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89년 혁명 대표로서 ‘그룹 20’의 일원이었던 대학생들은 드레스덴에서 동독 정권이 시민들의 시위에 무력으로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후에 튀링겐주 문화부 장관이 되었던 다그마 쉬판스키는 일메나우공대 학장과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작은 규모의 이 대학이 명문 교육기관으로 발돋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동독 지역에 위치한 소규모 대학들이 뮌헨이나 함부르크 또는 쾰른과 같은 서독 지역 대도시의 매력적인 대학들과 경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동독 지역 대학에 주어지던 혜택들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됐기 때문이다.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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