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혁명 구심점 됐던 교회, 공산 독재 붕괴 뒤 되레 약화

중앙선데이

입력 2021.04.0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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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호 27면

독일 통일 그 후 30년 〈6〉 

동독 시절 목사였던 요아힘 가우크 전 독일 대통령(오른쪽)이 2012년 3월 23일 베를린 분데스탁(연방하원)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의 아버지도 동독 개신교 목사로 활동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동독 시절 목사였던 요아힘 가우크 전 독일 대통령(오른쪽)이 2012년 3월 23일 베를린 분데스탁(연방하원)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메르켈 총리의 아버지도 동독 개신교 목사로 활동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사회주의 독재 권력에 맞서 동독 주민들이 1989년 10월 처음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였을 때 구심점이 된 것은 교회였다. 매주 월요일마다 열렸던 월요시위는 80년대 초부터 드레스덴이나 라이프치히와 같은 도시들의 여러 교회에서 시작됐던 ‘평화예배’ 끝에 이어졌던 집회였다.

교회, 동독 시절 체제에 저항 시도
정치 성향 목사들 격변기 큰 역할

통일 이후 동독 지역 신자 수 급감
일부 청소년들은 교회 모독 표현도
사회주의 무신론 득세하는 ‘역설’

80년대 서독에서는 중·장거리 핵미사일의 배치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이 벌어졌으며 동독에서도 이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이는 동독 정권의 선전과는 거리를 둔 교회의 보호막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89년 동독의 평화혁명 당시에 교회가 커다란 역할을 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예상 밖의 일이었다. 정작 동독 시절 동독 내 교회들은 별다른 특별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8~47세 동독인 73% 종교 안 믿어

동독 목사 출신으로 슈타지와 접촉 의혹을 받았던 만프레드 슈톨페 브란덴 부르크 주총리.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동독 목사 출신으로 슈타지와 접촉 의혹을 받았던 만프레드 슈톨페 브란덴 부르크 주총리.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오히려 교회는 박해를 당했으며 슈타지(국가보안부)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었고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체포되기 일쑤였다. 더 나아가 동독 정권은 교회를 고사시키려 했다.

동독 정권이 수립된 1949년에만 하더라도 동독 주민 중 92%가 기독교도였는데 대다수가 개신교도였다. 옛 프로이센과 메클렌부르크 그리고 작센 지역 주민 대부분이 개신교로 개종한 데다 비텐베르크가 마틴 루터가 설립한 개신교 교회가 위치한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동독 가톨릭교도는 개신교도보다 매우 적었는데 튀링겐의 아이히스펠트에 모여 살았다. 2차 대전 종전과 더불어 폴란드에 귀속된 오버슐레지엔과 동프로이센의 가톨릭 지역인 에름란트로부터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신도 수가 100만 명가량으로 늘어났다.

비텐베르크에 있는 마르틴 루터 동상.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비텐베르크에 있는 마르틴 루터 동상.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새로 들어선 동독 공산 정권은 처음부터 종교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종교는 민중에게 아편과 같다’고 한 카를 마르크스의 이념에 맞춰 동독 정권은 유물론적이며 무신론적인 세계관을 선전했다.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신문들을 통해 젊은 기독교인들이 모이는 ‘청년 커뮤니티(Junge Gemeinde)’와 같은 조직들과 교회에 반대하는 선동이 난무했으며 목사들에 대한 감시가 행해졌고 그중 다수가 체포됐다.

슈타지의 비공식 정보원들이 교회 내에서 암약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동독이 해체된 이후에 밝혀졌다. 튀링겐의 주교였던 잉고 브래클라인이나 신학 교수였던 알렉산더 라들러가 대표적 사례다. 이들로 인해 3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체포됐다. 또한 개신교 지도자 다수가 정기적으로 슈타지와 접촉했는데 통일 이후 사민당 소속으로 브란덴부르크 주총리를 지낸 만프레드 슈톨페가 그랬다.

베를리너 돔 교회.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베를리너 돔 교회.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동시에 교회는 공산주의를 배척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특히 동독 시절 초반에 교회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동독 정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교회를 통제하기 위해 동독에는 광범위한 정부 기구들이 존재했으며 그 수장은 교회 담당 차관이었다. 신축 건설 지역에 교회 시설은 애당초 들어서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이런 경우 기독교인들은 집에서 모였으며 서커스 차를 개조해 교회로 활용하기도 했다. 동독은 모두 76개의 교회를 철거했는데 이중엔 라이프치히대학 교회도 포함돼 있다.

동독 공산 독재 정권이 청소년들이 기독교 전통을 지키며 성장하기 어렵게 만든 게 실제로 교회에 가장 큰 타격이 됐다. 모든 초등학생은 ‘탤만소년단’에 가입할 것을 강요당했으며 그 이후에는 공산주의자유독일청소년단(FDJ)에 입단해야만 했다.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커다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으며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견진성사 또는 개신교에서 행해졌던 성찬식 의례는 점차 정권에 의해 진행됐던 청소년 서약식으로 대체됐다. 이 통과의례를 거부하는 경우에는 대학 진학이나 직업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성경 구절 ‘칼을 쟁기날로’는 동독 기독교 평화운동의 상징 문구였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성경 구절 ‘칼을 쟁기날로’는 동독 기독교 평화운동의 상징 문구였다. [사진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그러나 동독 정권의 교회에 대한 태도는 점차 바뀌었다. 역설적이게도 1953년 동독에서 발발했다가 실패로 돌아갔던 민중봉기 이후 동독 정권으로 하여금 반교회 선전을 완화하도록 지시한 주체는 바로 소련이었다.

이후 교회는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서독의 긴장완화 정책이 시작되면서 서독 교회들이 보내는 막대한 자금이 동독으로 유입됐는데 이는 동독의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됐다.

조직상으로 동독의 개신교회는 바로 ‘동독 개신교 연합’으로 분리했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분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원래는 서독 교구 관할 지역에 속했던 관구를 대상으로 관리자를 임명했다. 상징성을 지닌 베를린 대교구는 그대로 유지됐다.   교회는 ‘기독교 평화회의’를 통해 서독의 무장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으며 기독교 평화회의는 슈타지의 비공식 정보원이었던 브래클라인과 협조해 반서독 선전전을 펼쳤다.

하지만 동독은 이 대목에서 난관에 봉착하게 됐다. 평화활동의 하나로 80년대에 평화모임들이 지속적으로 생겨나면서 이 그룹들이 실제로는 반정권 세력의 모태가 됐기 때문이다. 통제 사회였던 동독에서 이 세력은 교회의 보호 아래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내려고 시도했다. 나중에는 환경 문제를 다루는 그룹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동독의 핵 능력 확충 시도와 같은 국가적 차원의 이슈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다.

동독 격변기에 정치적 성향을 지닌 목사들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마르쿠스 메켈은 동독 사민당을 만든 인물로 동독의 마지막 외교부 장관을 지냈다. 라이너 에펠만은 동독의 마지막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요아힘 가우크는 슈타지의 과거 청산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 통일 독일의 연방 대통령까지 지냈다.

89년 가을 동독의 교회는 의도치 않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았다. 당시 중요한 구호였던 ‘비폭력- 우리는 한 민족이다’를 만들고 퍼트렸던 주체가 교회였다. 원래 이 구호가 내포했던 의미는 시위대와 경찰 그리고 동독 인민군 모두가 한 민족이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 구호가 통일을 촉구하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이후의 일이었다.

90년 통일이 되자 교회의 통합 또한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다. 동시에 ‘사회주의식 교회(개신교회의 슬로건)’가 얼마나 많이 조종당하고 공작의 대상이 되었는지가 드러났다.

통일 이후 종교계 도약 기대는 착각

89년 당시엔 동독 주민의 40%만이 교회에 적을 두고 있었다. 통일과 함께 종교계가 큰 도약을 경험할 것이라는 기대는 착각이었다. 동독 시절 성인이 되는 시기에 치렀던 청소년 서약식을 통일 이후 여전히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조직들은 혼신을 다해 존속시키려고 했다.

체제 불만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동독 교회의 역할은 통일과 함께 사라졌으며 정치 성향을 가졌던 많은 목사는 정계에 진출했다. 이렇게 되자 동독이 없어진 지 30년이 지난 시점에 옛동독 지역은 세계에서 종교를 가진 인구가 가장 적은 곳이 됐다. 미국 시카고대학이 종교에 관해 실시한 국제설문조사에서 동독인 71.6%가 신의 존재를 믿어 본 적이 없다고 답변했다. 38~47세 동독인 중 72.6%가 종교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통일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무신론의 경향이 약화하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운 현상이다. 현재 드레스덴 성모교회 등 동독 신연방주의의 모든 교회와 성당이 복원됐다. 목사들은 국가와 계약을 맺어 안정적인 보수를 받고 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자선병원이나 학교들이 많이 있지만 무신론은 여전히 존재한다. 최근에는 공산당 후신 정당 혹은 좌파당 성향의 청소년들 가운데 일부가 수차례에 걸쳐 교회를 모독하는 표현을 함으로써 공공연하게 교회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동독이 무너지는 과정인 평화혁명 시기에 교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건만 이렇듯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나타나고 있는 종교에 대한 사회주의 측의 승리를 보노라면 역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 번역: 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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