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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다중체제 세계무역질서와 한국의 대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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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태호 광장국제통상연구원 원장·전 통상교섭본부장

박태호 광장국제통상연구원 원장·전 통상교섭본부장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추진되었던 국제무역기구(ITO)의 설립이 실패로 돌아가자 영국과 미국 등 주요 23개국은 1947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체결하고 이행에 들어갔다. GATT는 국제기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협상을 통해 관세를 낮추고 다양한 무역 관련 규범을 제정함으로써 세계무역이 빠르게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GATT 체제의 마지막 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가 끝나던 1994년 참여국들은 세계무역기구(WTO)의 설립에 합의했다. 통상전문가들은 GATT 체결 이후 거의 반세기 만에 국제무역을 다루는 국제기구가 탄생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환영했다. WTO의 관할영역이 서비스무역과 지재권보호 등으로 확대되면서 기존의 GATT는 상품무역협정으로 편입되었다.

GATT, 세계무역성장에 크게 기여 #도하협상 실패로 다자체제 위기 #다중체제 신무역질서 대비 위해 #중견핵심국가로 리더십 발휘해야

WTO는 2001년 다자무역협상인 도하라운드를 출범시켰다. 3년 이내 종료를 목표로 한 협상은 개도국과 선진국들의 입장차이로 난항을 겪으며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협상 종료시한을 훨씬 넘긴 2008년 당시 WTO 사무총장인 파스칼 라미는 중재안을 마련해 최종타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미국, 중국, 인도 등 주요국 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실패했다. 모든 회원국이 합의해야만 최종결정이 이루어지는 WTO의 특이한 의사결정 방식이 걸림돌이 되었다. 나아가 모든 분야의 협상이 다 함께 끝나야 한다는 일괄타결(Single Undertaking)원칙도 협상실패의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이렇듯 도하라운드의 실패는 WTO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도하라운드가 실패하자 미국은 민감한 의제에 대해 WTO 협상을 통해 중국과 합의를 이루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른 방식으로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전략을 모색했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 미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적극 추진하고 EU와는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협상을 진행한 것이 바로 그러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TPP와 TTIP은 각각 트럼프 대통령의 탈퇴 결정과 브렉시트(Brexit)로 인해 무산되었다.

바이든 신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는 다자무역체제의 재건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과거 경험에 비춰볼 때 WTO의 개혁이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WTO의 개혁추진과 함께 WTO를 보완할 수 있는 다른 방안들을 모색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디지털 무역규범과 같은 특정 이슈에 대해 입장을 같이하는 WTO 회원국들이 복수국가간무역협정(PTA)을 체결하는 것이다. WTO는 다자체제의 기반을 해친다는 이유로 PTA의 추진을 금지해 왔지만, 최근에는 경직된 의사결정 방식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 PTA를 허용하는 것이 더 낫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다른 하나는 지역무역협정(RTA)을 체결하는 것이다. 다자무역협정보다 더 큰 폭으로 시장 개방을 추진하고 민감한 통상 규범도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이 포괄적·점진적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가입하거나 그 전신인 TPP에 복귀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한 영국이 지난 2월 1일 CPTPP 가입을 공식 신청했고 심지어 중국도 가입 가능성을 언급했다. 나아가 미국은 EU 및 영국과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이렇듯 미국이 참여하는 RTA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통상전문가들은 이러한 RTA가 WTO의 개혁에도 자극을 줄 수 있다고 본다. 나아가 만일 중국이 CPTPP에 가입해 시장개방을 확대하고 새로운 통상 규범을 받아들인다면 향후 WTO 협상에서 중국의 입장이 유연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WTO의 개혁, PTA 활성화, 높은 수준의 RTA 추진 등이 단기간에 완성되기는 어렵다. 따라서 앞으로 WTO, PTA, RTA 등 다중체제가 병존하는 세계무역질서가 형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마도 WTO는 회원국 무역정책의 감시 및 공정한 분쟁해결에, PTA는 새로운 통상규범 제정에, RTA는 높은 수준의 시장개방 등에 중점을 둘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체제 간 분업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WTO가 중심이 되고 다른 체제들이 이를 보완하는 식으로 세계무역질서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WTO 중심의 다자무역체제가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PTA와 RTA가 확산되면 세계 무역질서가 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WTO의 개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대외의존도가 높고 세계무역 규모 10위권에 진입한 우리나라는 이제 핵심 중견 국가로서 새로운 세계 무역질서 형성 과정에서 능동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앞으로 있을 WTO의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복수국가간무역협정 추진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또한 대외경제관계 다변화를 위해서 CPTPP와 같은 높은 수준의 지역무역협정 가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박태호 광장 국제통상연구원 원장·전 통상교섭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