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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갑자기 줄어든 의료비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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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건강보험공단이 지난해 3531억 원의 재정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국정과제인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의 영향으로 2조 7천억 원 규모의 적자가 예상됐지만, 예정된 적자보다 2조 원 이상 줄어든 결과다. 그만큼 의료이용이 크게 감소했다는 것인데, 왜 병원에 덜 간 걸까?

예상보다 2조 이상 줄어든 의료비 #재정운용 비효율 여실히 드러내 #재정 늘수록 효율성 곱절로 필요 #효율성 강조한 재정준칙 도입해야

공단은 코로나19 위험 때문에 국민이 평소보다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등 위생관리에 더 신경을 쓰게 되어 감기, 결막염과 같은 감염성 질환의 환자가 감소한 결과로 진단했다. 자료에서 관측된 것이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필자는 2009년 신종플루 대유행 기간의 의료이용 추이를 연구한 적이 있는데, 이때도 비슷한 현상이 관측되었다. 특히 감염성 질환에 취약한 0~4세 영유아의 장염과 결막염 발병률은 각각 12%와 15% 감소했던 반면, 부상 등 개인위생과는 무관한 질환의 유병률 변화는 없었다. 역시 팬데믹 확산을 막기 위한 방역 캠페인의 부수적인 혜택이었다. 이처럼 팬데믹 기간에 감염성 질환으로 인한 의료이용이 현저히 줄어든 것은, 평소 우리의 위생 관념과 감염병 위험에 대한 인식 부족을 여실히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론 보건 당국이 평시에도 적절한 개인위생 수준을 유도할 수 있다면 국민 건강을 증진하면서 의료비도 절감할 수 있다는 의외의 교훈을 준다.

지난해 의료 지출이 예상을 밑돈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사람들이 코로나19 감염 우려 때문에 병원 방문을 줄였기 때문이다. 생명이 위독한 중증 환자들은 아닐 테고 대부분 의료 필요성이 낮은 경증 환자에서 이럴 가능성이 크다. 건강보험 보장성이 확대될수록 불필요한 의료이용이 늘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코로나19 위험으로 도덕적 해이가 줄어든 것이다. 도덕적 해이로 몇 년째 손해를 보고 있던 민간 실손보험 역시 지난해는 손해율이 현저히 개선되었고, 제약사들은 의약품 소비 감소로 영업이익이 줄어든 곳이 많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결과이면서도 건강보험재정에 도덕적 해이와 같은 재정 누수 요소가 적지 않다는 교훈을 준다.

지난 10년간 건강보험재정은 명목 값으로 두 배가량 증가했다. 인구고령화를 주된 배경으로 꼽지만,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의 영향도 크다. 더구나 현재 70조 원 규모의 건강보험지출이 향후 5년 내 100조 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면서 재원 조달 문제가 지금부터 난항이다. 이에 현재 소득 8%로 정해진 보험료율 상한을 높이는 법 개정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과연 국민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지난해 코로나로 인해 역설적으로 줄어든 의료비는 건강보험재정 운용의 효율성 개선이 절실하다는 점을 잘 뒷받침한다. 예방을 위한 투자 확대와 실효적인 도덕적 해이 방지 대책 마련 등 건강보험 재정의 지출 효율화를 적극적으로 도모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보험료율 인상에 대한 국민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국가재정 운용의 상황도 건강보험재정과 판박이다. 올해 정부 예산은 558조 원으로 10년 새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복지 수요가 급증하면서 사회복지예산의 덩치가 커진 것이 주된 요인이다. 기본소득이 대선 화두가 되어 가고 있는 마당에 복지 공약이 남발되면 내년 대선 이후 재정 증가율은 더욱더 빨라질 것이 분명하다. 인구문제, 불평등, 4차산업혁명 등 국가 난제를 풀어가려면 충분한 재정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점에 이의가 없다.  하지만 재정이 늘수록 그 효율성을 꼼꼼히 살피는 노력이 몇 곱절은 필요하다는 단서를 달아야 한다. 예산이 제한적이면 꼭 필요한 곳에 지출하지만, 예산이 풍족해지면 점차 필요성이 낮은 용처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건강보험재정의 경우처럼 국가재정 운용의 비효율은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한쪽의 절박함 때문에 헤프게 쓰이는 곳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잠시 뉴스를 검색해보면, 반납을 꺼려 연말에 몰아 쓰는 예산, 필요하다고 편성했지만 집행되지 않는 예산, 사업효과가 불투명한 예산 등에 대한 지적이 수두룩하다. 재정 규모가 커질수록 공유지의 비극을 경계해야 한다.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로 생존의 위기에 몰린 소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에 대한 손실 보상과 재난지원금의 재원 마련 논쟁이 한창이지만, 결국 올해도 수십조 원에 달하는 추가경정예산이 편성되고 대부분 국가 채무로 충당될 공산이 크다. 소상공인들은 생존 위기를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먼저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는 고통을 감내하고 벼랑 끝까지 몰려서야 어쩔 수 없이 빚지는 선택을 고민할 것이다. 기재부는 지난해 재정준칙 도입을 추진했으나 코로나 영향을 고려해 2025년부터 시행하기로 했다가 그마저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한국형 재정준칙 방안은 재정부담을 수반하는 법률안 제출 시 구체적 재원 조달방안 첨부, 사회보장기금 한도 초과 시 재정건전화 대책 마련 의무화 등 누가 봐도 수긍할 내용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올해 예산이라도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꼼꼼히 들여다봐야 한다. 국가 예산뿐만 아니라 가계 예산도 화수분은 아니다.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